오래전에 보았던 '대지진' '볼케이노' 등의 재해영화가 생각나는 며칠이었다. 그들 말고도 각종 재해와 재난을 주제로 한 영화는 거의 매년 있었고 흥행 성적도 대부분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최근에는 유사한 주제의 우리 영화가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솔직히 할리우드발 영화에서 느꼈던 뭉클한 여운보다는 씁쓸함이 더 큰 편이다.
오해의 여지가 있어 부언하건대 할리우드 영화 역시 정부의 무능이나 대부분 가진 자들로 그려진 인간의 탐욕에 대한 비판은 있었다. 그렇지만 줄거리도 또렷하지 않은 그들 영화에서 느꼈던 감동이 어렴풋한 여운으로나마 새삼스러운 것은 아마도 극한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인간의 의지와 자기희생, 깊은 인간애 때문일 것이다.
지난 울산 앞바다에서 발생한 5.5 규모의 지진을 시작으로 경주 인근에서 연이은 지진을 진앙지 인근에서 생생하게 체험하며 심장이 오그라드는 두려움도 느꼈다. 그렇지만 집 밖으로 나간 건 지난 12일 밤 5.8 규모의 지진이 발생한 뒤가 처음이었다. 가스밸브를 확인하고 혹시 몰라 지갑과 휴대전화를 챙겨들고 나간 거리의 상황은 지진과는 또 다른 두려움이었다.
먼저, 한 번 제대로 된 지진대비 교육조차 받은 적 없는 사람들이 인근 학교운동장이나 공원 같은, 건물 붕괴 위험 없는 공터로 향하는 모습은 참으로 현명해 보였다. 문제는 자동차였다. 그 사이 도로는 자동차로 가득 메워져 말 그대로 주차장이었고 차 안의 사람들은 도보로 걷는 사람들보다 훨씬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차 밖의 사람은 그나마 이동하는데 자동차는 꼼짝도 못하니 말이다.
재해나 재난이 크면 클수록 응급대응 기관의 이동이 원활해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만약 그 상황에서 우리 가까이에 흔한 주유소 화재라도 발생했다면 소방차는 뒤엉켜 주차장이 된 도로에서 발만 굴렀을 것이고, 자동차 안의 사람들은 멀거니 화마를 지켜보며 날아올 불똥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만약 전쟁이라도 나면 길 위로 몰려나온 자동차 때문에 군사작전도 불가능하고 길거리에서 오롯이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흔한 불안감이 생생하게 실감되는 순간의 두려움이라니!
더 문제는 국민안전처를 비롯한 국가기관은 물론이고 언론에서도 그에 대한 주의를 촉구하는 사례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계속되는 약한 여진 뒤에 지난 21일 밤 4.5 규모의 여진이 발생했을 때도 도로상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만 편하고 살면 된다는 의식으로 우리가 과연 할리우드 영화 속 인간의지의 기적과 인간애의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물론 안다. 영화는 픽션이고 그들 사회 역시 그리 감동적인 현실은 아니라는 것을. 그렇지만 피차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정부를 두고서 조금이나마 나은 우리 자신들의 결과를 위해서는 어떤 자세와 각오여야 하는지 가슴속에 담아둬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에 모멸감을 느끼지 않는 당당한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면 말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특히 세월호 사고 이후 우리 사회는 모든 재해와 재난을 오직 국가의 탓과 책임으로만 돌리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심지어는 출항신고도 제대로 않고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 바다낚시에 나갔다가 사고를 당해서는 '대책위' 운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국가의 탓과 책임만 강조하면 결국 국가의 힘은 점점 강해지고, 언제나 그렇듯 권력은 강해질수록 그 권력을 위임해준 사람들은 더욱 무시하게 마련이다. 권력을 제대로 압박하고, 주인을 위한 권력으로 변화시키려면 먼저 스스로 의지와 배려와 원칙을 지키는 자세여야 할 것이다.
이제 재난재해당국과 정부! 까놓고 당신들의 무능함에 사전 지진예보는 감히 바라지도 않소이다, 당장은! 지난 며칠 섬뜩한 지진을 연이어 겪으며 가장 절실했던 것은 뒤늦은 안전문자가 아니라 이후의 상황에 대한 설익은 내용이나마 예보였다.
'몇 분 전 규모 얼마의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본진으로 이후 여진이 이어지기는 하겠지만 더 강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앞선 지진은 전진일 수 있으며 조금 더 큰 본진이 따를 수도 있으니 일단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기다려주십시오'. 조금 틀려도 좋다. 사람이 일단 마음을 진정하면 설혹 조금 강한 지진이 뒤이어도 대처에 담대하지 않겠는가.
더 큰 본진 예상에 대피했지만 약한 여진에 그치면 더욱 좋은 것이고. 그런데 이미 겪은 지진에 대해서만 앵무새 노릇을 할 뿐 다음 상황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따로 없으니 그 불안이야!
이제 우리나라가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점은 기정사실화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마저 어긋난 뒤늦은 문자발송 개선 따위는 전혀 대비책이 아니다. 우선은 놀란 다음의 대비에 관한 솔직한(정말 조금 틀려도 좋다) 안내체계 마련,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최악의 상황에 대처할 수 있기 위한 최소한의 국민준칙 호소와 훈련, 소방·응급구호체제의 체계화가 필요하다. 그 다음에는 침착하게, 그러나 가능한 빨리, 1분 전 예보라도 가능하도록 진심으로, 사심 없는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정말 간곡히 부탁한다. 천재지변이니 집은 무너질 수도 있다. 하지만 1분 먼저 알면 생명을 지킬 테고, 5분 먼저 알면 가장 소중한 재산은 건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한숨 돌리고 둘러앉은 자리에서 나온 여러 말 중 가장 귀에 박힌 이야기가 있다. 집밖에서 술추렴하다가 지진에 놀라 집으로 달려간 남편. 다행히 13층에서 계단으로 내려와 아파트 마당에서 넋이 빠져 있는 아내를 보니 그렇게 반갑더란다. 괜찮은지 물으니 혹시 몰라 금반지와 목걸이를 찾아 움켜쥐고 나왔다며 손바닥을 펴 보이더란다. 까닭을 물으니 그게 쉽게 돈이 될 것 같아서라는데, 옷은 집안에서의 차림이었단다. 그래서 남편, 집에 들어가자마자 따뜻한 패딩 점퍼와 바지 따위부터 한 벌씩 챙겨 옷장 문 앞에 비치했단다. 만일의 사태가 있어 노숙이라도 하게 되면 몸 약한 아내에게는 추위가 제일 문제일 것 같아서 말이다. 과연 연륜의 현명함 아닌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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