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 체류한 지 일주일째다. 지금 여기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작은 도시 '론다'의 시각이 밤 11시30분을 넘기고 있으니 한국은 새벽 6시30분쯤 될 것이다.

스페인에 오면서 휴대전화의 '유심'을 현지 것으로 갈아 끼웠다. 이 유심은 스페인에서 쓰는 데이터는 무한대이지만 한국에서 오는 문자나 전화는 먹통이다. 여기서 갈아 끼운 유심의 고유 전화번호를 따로 알려주지 않으면 누구도 나에게 연락을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오늘 이 글을 쓰기 전에 알았다. 대개 원고마감이 되면 신문사 데스크에서 문자로 연락이 온다. 내일이 원고마감이니 잊지 마시라고. 그런데 오늘따라 연락도 없고 전화도 없었다. 현지 유심으로 갈아 끼운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스마트폰을 스마트하게 사용하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알아지는 것이 있는 만큼 공부하지 않으면 절대 모르는 것도 그만큼 늘어난다.

한국에서 여기 론다에 오기까지 많은 도시를 거쳤다. 우선 터키 이스탄불에서 환승했다. 동서양의 힘과 문화의 충돌지역이라고 학교 역사 시간에 배웠지만 뉴욕 못지 않게 인종 전시장이다. 동행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유럽인의 얼굴에, 아시아인의 가슴에, 아프리카인의 궁둥이와 라틴계의 허벅지를 가진 조각'들의 행진이라고. 말의 뜻을 되새기자면 그만큼 조화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시절이 부조화의 시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진화의 시대인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세르비아로 국내선을 타고 왔다. 그리고는 승합차 형태의 밴으로 계속 여행 중이다. 인종도 다르지만 풍광도 아주 다르다. 오늘 론다로 오는 길에서 보았던 수많은 구릉에는 올리브 나무들이 오와 열을 맞춘 채 뜨거운 태양 아래 머리채를 뒤집고 서 있었다.

올리브 나무는 나무 중에 가장 피곤한 자세로 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오래전에 한 적이 있다. 아마 30년 전쯤에 이탈리아 남부의 항구도시 브린디시에서 만난 가로수가 올리브 나무였다. 올리브 잎의 표면은 옅은 회색빛을 띤 녹색이지만 뒷면은 짙은 회색빛을 띤 녹색이다. 이 잎의 표면은 하늘로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불면 잎의 뒷면이 하늘을 보고 흔든다. 멀리서 보면 회색 잎이 마치 땅바닥을 향해 머리채를 처박듯이 웅크린 채 서 있다. 그것도 찌는 듯한 태양 아래 흔들리면서.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건축물(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자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는 가우디의 건축물은 내게 어쩐지 올리브 나무 같거나 아니면 올리브 나무들이 결실을 야무지게 맺는다는 척박한 땅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씩씩하게 펴지 못하고 오그라들고 굴곡지고 거칠다. 그러면서 시간을 견딘다.

자연은 인공과 달리 세련미는 없지만 기댈 곳이 있다. 단단하고 직벽으로 올라선 도회의 건물은 기대려고 하면 허리를 무리하게 접듯이 구부려야 하지만 가우디의 건물과 자연의 투박함은 허리를 구부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품어주는 맛이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스페인 남부의 구릉지대에서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서 있는 올리브 나무가 안쓰럽게 느껴진 것은 우리네 삶이 투사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세련되고 말끔하게 포장돼 형식화되어 가는 가운데 그저 존재하는 그 자체로 바람에 흔들리고 태양에 주눅 들고 그래서 주저앉고 싶은데도 주저앉지 못하는 것은 살자고 견뎌낸 척박한 땅의 그 육중한 줄기 때문이라니.

대형 트랙터가 자유롭게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여유를 두고 격자로 심겨진 올리브의 성목과 노목들 사이사이에 겨우 몸을 지탱하고 견딜 만 한 엄지손가락 굵기의 묘목들이 지지대에 기대어 또 서 있다. 성목은 성목대로 머리채를 흔들며 서 있고 노목은 노목대로 머리채를 흔들며 서 있다. 이제 곧 잘려 버려질 운명인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가 신의 시간을 모르듯, 올리브 나무의 노목은 자신이 화목으로 버려질 시간을 모르는 듯하다.

스페인의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끝없이 이어진 올리브 밭의 성목과 노목의 사이에 심겨진 허리 잘록한 묘목의 잎사귀들이 바람이 부는 대로 요동치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어쩐지 오늘 밤은 잠을 제대로 못 이룰 것 같다.

'아름다운 것에 이유가 필요합니까?' 오늘 내가 보았던 그 수많은 아름다운 광경은 하나같이 내일을 견디지 못할 것들이다. 그것들이 견딘들 우리 인생이 견디겠는가? 아름다운 것에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이유를 대기도 전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저 어린 올리브 묘목들이 평생 쉬지 못하고 죽어 가는 것은 살기 위해 허리를 곧추세운 줄기 때문이나니.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