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투설(鬪說) /박명호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6-09-30 19:08:18
| 본지 19면

태어나면서부터 가정에서는 싸우지 말라고 한다. 싸우기를 싫어하는 것은 굳이 부모들이 강조하지 않아도 인간이면 본능적으로 그것이 나쁜 것임을 안다. 그런데 교육의 장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학교에서 배우는 위인들은 대부분 잘 싸우는 사람이다. 김유신 이순신 등 대부분 싸움과 관련이 있다. 싸워야 하는가, 싸우지 말아야 하는가.

맨 처음 교육의 장에 들어섰을 때 나는 이런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었다.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또래들을 만나는 그 무렵은 어디든 서열 경쟁이 치열했다. 물론 직접 힘 겨루기나 싸움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비교 우위로써 서열이 정해졌다. 위로 형이 많았고, 장터 골목대장 출신인 나는 맞싸움 한 번 하지 않고서도 우리 반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런 식으로 옆 반에도 일인자가 정해졌다. 하지만 달랑 두 반밖에 없는 작은 시골 학교에서 일인자가 둘일 수는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본인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모일 모시 학교 뒤 풀밭에서 이른바 '한판' 붙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누가 어떻게 낸 소문인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약속이 되고 말았다. 당시 아이들 사회에서도 전쟁의 후유증이라 할 수 있는 싸움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었다. 아이들 입장에선 일인자를 가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힘깨나 있는 아이들에겐 '맞짱 싸움' 한 번 붙지 않고 서열에서 밀린 것에 대한 보상심리도 있었을 것이다.

주사 한 방에도 벌벌 떨던 나에게 그와 같은 일을 감당하라는 것은 너무 가혹한 벌이었다. 상대편 아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국 피하고만 싶던 그날은 왔고, 우리는 상대에 대한 아무런 적의도 없이 그들이 준비한 링 위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불안감 때문에 반 아이를 여러 명 데리고 그 현장으로 나갔다. 상대도 나처럼 여러 명과 함께 나왔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맞선 서부 영화 속의 총잡이처럼 학교 뒤 풀밭 가운데 맞섰다. 누구도 먼저 주먹을 내밀지는 못했다. 너무 무거운 분위기 탓인지 양쪽 편에 응원 온 아이들까지 응원은커녕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여덟 살 어린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긴장된 시간이었다. 앙, 그때 응원 나온 녀석 가운데 하나가 그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싸움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그때 나는 무엇 때문에 싸우려 했고, 아이들은 왜 나를 싸움의 장으로 밀어 넣었을까.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그것은 의(義)도 선(善)도 아니었다. 집단의 나쁜 가치관이요 나쁜 문화인 것이다. 계백 장군은 가족을 모두 죽이고 전쟁을 하러갔다. 무엇을 위해 가족까지 죽이고 싸웠는가? 나라를 위해, 정의를 위해 자기 가족을 죽인다? 계백 장군이 만약 그 전쟁에서 이겼다면 가족이 모두 죽었는데 그 승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라에 충성하기 위해서라면 나라는 내게 왜 필요한가? 나를 비롯한 가족을 지켜주기 때문이 아닌가.

나라를 위해 내 가족을 다 죽인다? 그건 어처구니없는 악이다. 아니, 악 이전에 가치관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그릇된 가치관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옛 소련 시절 아버지를 고발해서 영웅이 된 소년이 있다. 분위기가 잘못 흘러가면 그런 살벌한 사회가 될 수 있다.

종교에서도 선한 싸움은 의로운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세상에 선한 싸움은 없다. 싸움이란 어떤 경우도 좋은 싸움이 없다. 모든 싸움에는 후회가 뒤따르는 법이다. 병법에서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싸움을 부추긴다. 그 정도가 점점 더 심각해진다. 요즈음 내 주변에는 평소 얌전하던 사람까지 갑자기 투사로 변신하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평생직장을 나가버린 K가 그렇다. 그는 직장 생활에서 대체적으로 긍정적 순응적인 모범생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자기 일만 충실히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조금씩 어투가 거칠어지며 사람들과 다투는 횟수가 늘더니 마침내 육박전까지 벌이고는 직장을 그만두고 말았다. 모두가 그의 갑작스러운 변신에 의아해 하지만 싸움을 부추기는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 성장한 그의 한계, 곧 싸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의한 행동일 것이다.

왜요? 수업시간 아이들에게 대수롭잖게 한 질문이나 지시에 날이 선 반문이 날아온다. 참 싸가지가 없다. 요즘 여자 아이들의 평균 어투가 그렇다. 정말 교사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다면 조금은 공손한 자세의 '왜요?' 일 것이다.

주의하지 않고 평소 기분에 따라 한마디 했다간 곧바로 싸움이 벌어진다. 그래선지 요즈음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말들이 너무 전투적이다. 내뱉는 말들이 일부러 싸움을 하려고 상대를 자극하는 것 같다. 아슬아슬하기 그지없다. 우리 사회 여기저기서 노골적으로 싸움을 부추기고 조장한다. 모두가 전투적으로 바뀌어간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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