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이 지난달 28일부터 시행됐다. 참으로 놀랄 만한 내용도 많이 포함됐다. 성의 표시와 접대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더치페이 문화 등의 사회풍조가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 온정적 배려를 우선하던 우리 사회가 차가워지지 않을까 내심 걱정된다. 하지만 한 단계 더 선진사회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적응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참에 그동안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 가운데 하나였던 갑을문화도 사라졌으면 한다.

분야를 불문하고 급변하는 시대적 조류는 병원계에도 들이닥치고 있다. 변화의 저변에는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환자들에 대한 안전과 의료 질 향상이라는 명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2014년 장성요양병원 화재사건과 메르스 사태 이후 일련의 법 개정을 통해 제시된 여러 규제가 병원운영에 엄청난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계부처가 얼마나 인지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병원은 공공기관이지만 대부분 민간이 운영하고 있어 건전한 경영수지가 수반돼야만 질 높은 의료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다.

지난 6월 30일 '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으로 모든 요양병원에 스프링클러 설치가 의무화돼 이미 운영 중인 요양병원도 2018년 6월 30일까지 설치를 완료해야 한다. 환자안전을 위한 피치 못할 조치이기에 수용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요양병원의 운영난을 고려해 요양시설처럼 관계당국에서 일정부문을 지원해줄 것을 협회를 중심으로 누차 건의하였으나 결국 무산됐다. 현재 대다수 요양병원이 예산문제와 공사기간 중의 기존 입원환자들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못한 채 걱정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관계당국은 다음 달 중 법 개정을 시행한다고 한다.

기존 운영 중인 병원도 2018년 12월 31일까지는 개정된 시절 기준에 맞춰 시설 개선을 해야 한다. 스프링클러 설치와 향후 의료시설 개선에 소요될 막대한 비용부담이 예상된다. 요양병원은 전염성 질환자를 입원시킬 수 없는데도 이와는 무관하게 일반병원과 같이 병상당 이격거리를 1.5m이상 확보하라는 개선안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조치이다. 또 현재 0.8m인 병상당 이격거리를 1.5m 이상 늘리고 4.3㎡인 다인 입원실 면적을 7.5㎡로 넓히면 기존 요양병원의 평균 병상 수가 현재보다 약 30% 이상 줄어들 수밖에 없다.

또 기본적으로 다인실로 운영되고 있는 국내 의료기관의 현실에 다인실 병상이 적은 선진국의 사례를 들어 일반병원은 물론 요양병원까지 벽에서 90㎝를 이격하라는 것도 현실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물론 관계당국은 의료질 향상과 감염관리를 위한 의료 시설기준 강화방안이 사전에 병원협회 등 관련단체의 의견수렴을 통해 추진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형병원과 중소병원, 일반병원과 요양병원 등 상황에 따라 여러 차이가 있는 만큼 좀 더 충분한 시간을 갖고 다양한 의견수렴과 논의의 장을 거쳤다면 30년 만에 대폭 개정되는 시설기준 개선안이 이처럼 현실을 무시한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입법예고 후 협회나 여러 병원 관계자로부터 많은 의견이 개진되고 있고 관계부처에서도 유연성을 갖고 의견을 청취하고 있다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차후 공포될 법령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개정안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기존 병원에 대한 시설 개선 기한도 병원 운영의 어려움을 고려해 그 시기를 최대한 유예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동안 보건의료분야 특히 요양병원은 노인의료의 한 축을 담당하며 의료발전에 기여해 왔을 뿐 아니라, 고용창출을 통해 청년실업 해소에도 큰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이번 의료 시설 개편이 오히려 많은 소규모 요양병원을 도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함께 시설 개편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줄어드는 병상 수 만큼 기존 직원들에 대한 처리도 향후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절반이 지난해보다도 먹고살기 힘들다고 느끼고 있다고 한다. 세계적 경제부진과 교역감소 및 보호무역주의 강화 등으로 수출여건이 악화되고, 국내적으로는 기업들의 실적 악화로 인한 투자부진과 가계부채 증가 및 실질소득 감소로 인한 소비위축이 심화되며 세계경제가 '사면초가'의 상황에 직면했다는 우려가 높아진다.

의료계 또한 현 경제상황과 맞물려 지속적인 입원환자의 감소로 어렵지 않은 병원을 찾기 힘들 정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번 시설기준 개정이 의료기관 선진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면 요양병원계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충분히 고려한 정책검토가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의료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직진 위주의 일방통행보다는 서로를 배려하는 여유로운 쌍방통행이 돼야 할 것이다.

나라·동일의료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