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간 파행상태에 몰렸던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우여곡절 끝에 그 나름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한 채 무사히 막을 열었다. 10일간 300여 편의 영화가 상영되고 많은 국내외 영화인이 행사장을 방문하고 있다.

이 가운데 지난 10일 대만의 허우 샤오시엔,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리고 한국의 이창동 감독이 '특별대담 1: 아시아 영화의 연대를 말한다'는 프로그램에 참여해 아시아 영화가 함께 발전하고 상생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초창기부터 '아시아 영화'가 중심이 되는 영화제를 내세웠던 BIFF의 취지에 부합하는 의미 있는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이들 세 감독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영화를 만들어 온 거장이라 목소리 역시 울림이 크다.

1980년 '귀여운 여인'으로 데뷔한 이후 대만 뉴웨이브 운동을 주도했던 허우 샤오시엔 감독. 초창기 '카메라를 든 역사가'가 되길 희망한 그는 대만의 근대사를 다룬 삼부작 '비정성시' '희몽인생' '호남호녀'를 연이어 완성했다. 특히 1940년대 중반의 대만을 배경으로 한 가족의 비극적인 역사를 다루었던 '비정성시'로 제46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으면서 국제 영화계에 그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피사체를 멀리 두는 롱 쇼트와 긴 흐름을 보여주는 롱 테이크 기법이 독특했고,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막내 문청 역의 양조위의 연기가 돋보였던 작품이다.

2000년대에 들어 '카페 뤼미에르' '쓰리 타임즈' 등의 작품을 계속 만들어 온 허우 감독은 대만 국내 영화제의 위원장직을 맡으면서 7년여간 공백기를 가졌다. 하지만 지난해 '자객 섭은낭'이란 영화로 복귀하자마자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당 시대 고전에서 소재를 딴 이 영화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현란한 칼싸움이나 피비린내 나는 살육 장면은 만나보기 어렵다. 장면을 채우는 건 느린 호흡의 유려한 이미지와 고요함, 그리고 자객이면서도 끝내 살해 지시를 거부한 채 먼 길을 떠나는 섭은낭의 선택이다. 초창기 역사와 인간이라는 문제에 몰두했었던 허우 감독의 세계관이 '인간'이라는 더욱더 근원적인 화두에 다가섰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는 이와이지와 더불어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본 감독이다. 필자 역시 초기작 '원더풀 라이프'를 본 후 그의 영화에 매료되었다. 사람들이 죽으면 찾게 된다는 림보 단계, 그곳에서 1주일간 머무르며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소재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 기법을 차용하는 등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었다. 그 이후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등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 온 그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로 2013년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히로카즈 감독은 영화 각본 대부분을 직접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 속에 숨어있는 깊은 상흔이나 갈등을 즐겨 다룬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다루는 그의 시선은 따뜻하다. 지난여름 그의 최근작 '태풍이 지나가고'를 보았다. 태풍이 휘몰아치는 날, 이혼한 부부가 시부모의 집에 아이와 함께 다니러 왔다 발이 묶이는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 역시 그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터치로 대를 이은 부자간의 관계, 그리고 부부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었다.

이창동 감독 역시 앞서 언급한 두 감독 못지않게 자신의 색깔이 뚜렷하다. 이 감독 역시 초기작인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등에서 각본을 쓰고 연출을 담당했다. 특히 열차에 몸을 던지는 한 남자의 마지막 순간으로부터 시간을 거슬러 박하사탕으로 상징되는 순수하고 해맑던 젊은 시절로 마무리되는 '박하사탕'은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관객들에게 격변하던 1970, 80년대의 기억과 그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마멸된 수많은 죽음에 대한 기억과 회한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청준의 소설 '벌레이야기'를 각색한 '밀양'이나 감독 자신이 각본을 쓴 '시'에서도 인간에 대한 그의 탐구는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던 초기 영화와는 달리 그의 후기 작품들은 더 내밀화되고 보편화돼 나타난다. 이들 영화는 '용서'의 문제를 미묘하게 다루거나 시를 쓰는 과정이 사물의 본질과 맞닿아 깊은 인식으로 이어짐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시'는 칸영화제 각본상을 받기도 했다.

허우 샤오시엔,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리고 이창동. 그들이 다루어 온 소재나 주제, 영화기법은 다르지만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한결같이 '인간'이다. 인간에 대한 진지한 모색과 삶의 양상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오늘날의 그들을 있게 만들었다.

특별대담 말미에서 그들은 각자 준비하고 있는 다음 작품들에 대해 밝힌 바 있다. 세 감독이 버무려낼 또 다른 '인간'의 이야기가 벌써부터 손꼽아 기다려진다.

동서대 교수·영어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