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3세, 7세 아이 둘을 데리고 부산 해운대 바닷가 인근 식당을 찾았을 때 일이다. 지인과 함께 각각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상가에 들어섰는데 식당으로 가는 길에 4, 5개의 계단이 있었다.

모래놀이 용품과 간식, 여벌 옷등을 넣은 배낭을 유모차 손잡이에 잔뜩 걸어 뒀던 우리는 계단 앞에서 쩔쩔맸다. 누가 도와주면 좋겠다는 마음만 있을 뿐, 도와달라는 말도 못 하고,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어 난감하게 서 있는데 여행용 배낭을 짊어진 한 외국인이 다가왔다. 그는 "도와줘도 되겠느냐"며 두 대의 유모차를 차례로 계단 아래로 옮겨 준 뒤 손을 흔들며 총총 사라졌다.

계단 앞에 서 있던 약 1분 동안 꽤 많은 사람이 지나갔지만, 먼저 손을 내미는 이는 없었다. 마음은 돕고 싶었더라도 왠지 쑥스럽기도 하고, 남의 일에 나서기 싫은 감정 등이 교차했을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어린 시절부터 어려운 사람을 돕거나 남을 배려하는 생활이 몸에 배지 않았기에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때부터 사소하지만, 남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일상 찾기에 관심이 갔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혹시나가 '역시나'로 끝났다. 무거운 출입문을 여닫을 때 바로 뒤에 따라오는 사람은 안중에 없이 손잡이를 놓아 버리고, 지하철 등에서 만삭인 임신부를 모른 체하는가 하면, 지하철 승강장에서 수레를 끌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노인을 외면하는 등. 소소한 일상에서 배려나 친절 등의 단어가 사장됐다고 느낀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며칠 전 본지(지난 19일 자 2면 보도)는 '현대판 장발장' 기사를 소개했다. 담장을 넘어온 대추나무에서 20개 남짓 열매를 딴 60대 청각장애인을 대추나무 주인이 경찰에 신고하면서 입건된 내용이다.

애초 대추 주인은 청각장애 사실을 모르고 "대추를 왜 땄느냐"는 추궁에 사과하지 않아 화가 났다고 하지만 전후 사정을 알고 난 뒤에도 끝까지 처벌을 원했다고 한다.

대추 20알 때문에 한평생 경찰서에 갈 일이 없었던 그 장애인은 경찰서에서 조서를 쓰고, 즉결 처분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한마디 사과로 끝낼 수 있을 법한 일을 법정으로까지 끌고 간 대추 주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른바 '헬조선'으로 불리는 팍팍한 삶에 분노가 일상화된 것 같아 두렵기까지 했다.

최근 '광안리 외국인 세 모녀'가 화제가 됐다. 지난 5일 태풍 차바가 휩쓸고 간 광안리 해변에서 30대 엄마와 6세, 12세 난 두 딸이 4시간 동안 쓰레기로 뒤덮인 해수욕장을 청소하는 모습에 대한민국이 들썩였다. 전국 언론이 SNS를 통해 알려진 모녀를 찾아 헤맸고, 마침내 찾아낸 그들을 앞다퉈 소개했다.

"우린 부산 사람이고 이 동네 사람이니까 우리 동네를 치우는 것은 당연하다"는 소감에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사는 동네를 치우는 당연한 일이 기삿거리가 되고, 왜 치웠느냐고 묻는 기자들의 질문이 황당했을지 모르겠다. 해수욕장이 휴지통인 양 온갖 쓰레기를 버리거나 눈 오는 날 자기 집 앞 눈도 잘 치우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부산에서 7년간 살고 있는 세 모녀에게 어떻게 비칠지 걱정스럽다.

일부이긴 하지만 세월호 희생자와 유족을 모욕하며, 공권력에 목숨을 잃은 백남기 씨의 가족을 공격하는 무례한 모습을 보면 그들의 '일상화된 배려'가 한없이 부러워진다.

사회1부 차장 iej09@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