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낸 게 아니라 그들이 떠나간 거야." 친구 Y의 말이었다. 뜻밖의 그녀 말에 놀라움과 궁금증이 일었다. 여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믿음과 다른 사실을 전하는 친구가 낯설기도 했다. 오랜만에 듣는 친구들의 이야기는 좋은 소식보다 나쁜 소식이 더 많았다. 전화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위로의 말을 어떻게 건네야 할지 난감했다. 결국 전화기를 내려놓고 말 때가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친구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Y의 경우는 좀 달랐다. 그녀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궁금해하던 차에 스스로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비 온 뒤라 추워질 거야, 라는 내 말에 시종 차분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웃음과 함께 높아졌다. 날씨 속에 실어 보낸 내 속내를 눈치 빠르게 금세 알아차린 것이다.

Y는 자타가 인정하는 공주였다. 어릴 때부터 받아온 넘치는 사랑과 시선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것은 오래 낀 반지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녀의 첫 남자는 모든 여성이 부러워할 만했다. 남자는 재력이 튼실한 것은 물론이고 잘생긴 외모에 성격도 서글서글하니 좋았다. 그런 남자를 Y는 삼 개월 만에 곁에서 내쳐버렸다. 주변의 모든 사람은 그 이유를 몹시 궁금해했다. Y는 남자와 헤어진 이유를 그가 어느 모임 장소에서 술 취해 내뱉은 말 한마디 때문이라고 했다.

백옥 같은 피부로 왕자의 눈에 띄어 결혼한 백설공주는 행복하게 잘 살았다, 라는 믿어지지 않는 동화를 철석같이 믿고 자란 Y는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백마 탄 왕자를 잘도 찾아내고 잘도 떠나보냈다.

Y가 결혼할 때 우리는 뭔가 보이지 않는 위태함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고르고 고른 남자이니 잘 살기를 바랐다. 그런데 가끔 모임에서 만난 그녀는 마음 편한 여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Y도 말하지 않고 우리도 묻지 않았다.

전화기로 그간의 안부를 묻는 우리는 세월의 징검다리를 너무 겅중겅중 뛰어넘었다. 이제 학교나 유치원에서 동화구연을 한다는 그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직업을 가져본다고 했다. 자신이 제일 잘하고 자주 하는 동화구연은 '종이봉지 공주'인데 자신의 별명이 돼 버릴 정도로 아이들이 너무너무 좋아한다고 했다. Y는 자신이 정말 대견하고 예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를 칭찬한다고 했다. 자신의 처지를 감추기 위한 말이 아닌 진실로 느껴졌다. 본인을 정말 기특하고 대견하게 여기는 마음이 몇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내게 생생하게 전해져왔다.

어느 나라에 엘리자베스라는 아름다운 공주가 살았다. 휘황한 공주의 성에는 예쁜 옷과 보석들이 널려 있었고 곧 결혼할 멋진 왕자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커다란 용이 나타났다. 그 용은 불을 뿜어 성을 모조리 불태운 후 왕자를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사랑하는 왕자를 구하기로 결심한 공주는 용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옷이 모두 불타 없어져 종이봉지를 둘러쓰고 가야 했다. 어렵게 용의 은신처를 찾은 공주는 지혜를 발휘해 용을 지치게 만든 후 왕자를 구해냈다. "그슬린 그 옷은 뭐야, 어서 가서 공주의 옷을 입고 다시 와." 용이 뿜어낸 불에 그슬린 종이봉지 옷과 왕자를 찾아 헤매느라 누추해진 공주의 모습을 보고 실망한 왕자가 말했다. 종이봉지 공주는 자신의 겉모습을 보고 사랑한 왕자와 헤어졌다.

친구 Y가 제일 좋아한다는 '종이봉지 공주' 동화다. 오랜 세월 백설공주로 살아온 친구는 행복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건 그저 동화일 뿐이라고 했다. 나는 그걸 이제 알았니,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침묵했다. 그녀가 만났던 이들은 남편을 비롯해 모두 종이봉지 공주의 왕자들처럼 Y의 외양만 보고 다가왔던 이들이었다. 겉모습의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그들은 곧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이지만 이번에는 종이봉지 공주처럼 스스로 떠나보냈다고 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입었던 휘황한 드레스와 장신구를 벗고 스스로 종이봉지 공주가 된 친구의 가을을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화려한 외양을 치장하느라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Y의 속내 보석이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