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전쯤, 일본 후쿠오카 소재의 한 극단으로부터 강사로 초청받은 워크숍을 진행하기 위해 후지사키를 찾았다. 도착한 다음 날, 점심이 좀 지나서부터 준비해 온 페이퍼들과 마지막 날 발표할 공연 대본을 거실 책상 위에 쭉 펼쳐 놓고 앉았다. 하지만 워크숍에 관한 걱정들 때문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그래, 잡념이 생길 때는 역시 목욕이 최고다! 극단 샤워실에는 바닥보다 낮게 스테인리스 욕조가 설치되어 있다. 언뜻 보면 커다란 사각 싱크 볼처럼 생긴 이 욕조는 일본의 좁은 욕실을 위한 보급형 욕조였다. 재질이 스테인리스다 보니 처음에 사용했을 때는 뭐랄까, 뜨거운 김이 나는 곰탕 솥 안에서 푹푹 삶기고 있는, 육수 재료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삼사십 분 정도 느긋하게 반신욕을 하며 하루 피로를 푸는데 욕조가 금이든 플라스틱이든 스테인리스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덕분에 좀 우스꽝스러운 상상을 하며 피식 웃을 수도 있지 않은가. 오히려 사는 곳의 크기에 집착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다시 한 번 곱씹게 된다.

나는 곰탕 재료를 자처하며 스테인리스 욕조에 앉았다. 안개가 걷히듯 뜨거운 수증기와 함께 쓸데없는 걱정들이 날아가자 아주 담백한 문장들만이 남았다.

나는 몇 가지의 질문들을 좀 하고 싶었다. 가령 드라마는 무엇인가? 극장이란 무엇인가? 연기라고 하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며, 배우는 어떤 존재인가? 등등. 전부 재미없고 지루하고 답도 없어 보이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그런 질문들 말이다. 하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느샌가 이런 질문들과 의문들 따위는 잊고 연극을 하는 행위 그 자체에 몰두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개인적 회의감 때문이었다. 아니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길을, 시간을 잃어버린 것 같은 공포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시작을 찾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했다. 시작을 알아야 다음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 때문이었다. 달리 이야기하면, 지금부터의 다음을 모르겠기에 반대로 시작에 관한 질문을 다시 하게 된 것이다. 확실히 머리 아픈 문제임은 틀림없다.

팀원들과 함께한 산책길에 아키가 내게 질문을 했다. 아키는 이번 워크숍 때문에 도쿄에서 일부러 후쿠오카까지 온 열정 넘치는 4년 차 연극인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다음엔 뭘 해야 하죠?" "글쎄, 아직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우선은 좀 더 열심히 해봐. 그러면 다음에 가야 할 길이 자연스레 보일 거야." "아, 그렇군요." 거짓말이었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자연스레 보이는 일은 사실 상당히 드물다. 답을 찾을 거라 쉽게 장담할 수도 없으며, 심지어 그 과정은 괴롭고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며칠 후. 지난 2월에 함께 공연했던 츠루와 유키를 톈진에서 만났다. 가볍게 맥주 한 잔씩하고 방향이 다른 유키와는 먼저 인사를 한 뒤 츠루와 나는 좀 더 길을 걸었다. 느닷없이 그가 질문했다. "나 이대로 좋은 걸까요? 나이도 점점 많아지고 재능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좀 혼란스러워요." "한 번에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지. 부러운 일일 수 있어. 하지만 천천히 한 계단씩 경험을 쌓아가면서 올라가는 것도 나쁘진 않아. 그사이에 우리는 많은 걸 느끼고 많은 의미를 발견하게 되겠지. 괜찮아." 이번에도 거짓말이었다. 나와 대화를 나누면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난다는 그 친구에게 나는 마치 삶을 전부 이해한 것처럼 그저 허세 섞인 말들을 늘어놓은 것이다.

나는 아키의 미래를, 츠루의 미래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좌절할 수도 있고 꿈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을 수도 있으며, 그나마도 실패를 거듭하다가 포기를 먼저 배울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꿈을 좇고 길을 방황하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 딱 잘라 말할 수도 없다. 난 그것에 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워크숍을 하는 내내 나는 이것을 강조했다. 삶과 우리 내·외부의 세계에 대한 진지한 물음 없이는 어떠한 예술도 할 수가 없다고.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드라마이고 연극이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나는 지금 제대로 된 질문을 하고, 답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헤매고 있는가. 내가 다음으로 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을 알려주는 워크숍이 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달려가 가르침을 받고 싶다. 산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아키야, 츠루야, 힘내렴! 그리고 답을 찾거든 내게도 좀 알려다오.

연극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