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차례 찬바람이 나다가 소설 절기 손돌바람까지 불고 나니 가을은 저만큼 멀어지고 말았다. 이 가을은 어찌 지나갔는지 모르게 떠나고 만 것이다. 낡은 은유는 상투적이라 꺼리게 마련이지만, 우리 땅의 옛 별명이 왜 금수강산인지 설핏이라도 증명하는 호시절인데 말이다. 가을은 조락의 계절, 푸르던 여름이 감춰 두었던 불꽃이 가을을 불태운다. 그리고 시들어 말라간다. 가을의 끝자락,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은 잠시 침잠이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일깨운다. 그래선지 춘하추동 사계와 예술을 연결시켜 생각한 그리스인들이 가을은 비극에 해당한다고 보았는지 모르겠다.

가을의 비극은 조락하는 나뭇잎에 대한 연민, 그를 죽음과 연결시키는 공포를 환기시킨다. 강렬한 느낌만큼 비극은 선정적이다. 추락 직전의 고혹, 그것이 모순의 공존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얼마만큼 나이를 먹어야 했고 부패와 발효의 아슬아슬함을 견딘 곰삭은 김치를 제대로 맛보기까지 얼마만 한 시간이 걸렸던가. 하지만 이 가을 단풍놀이는 사치스러웠다. 산란한 정신 쏟을 데를 찾다가 붓으로 글씨 연습을 시작했다. 같은 학과 노선생께서 내려주신 글씨를 베끼고 또 베꼈다. '멀고 먼 차가운 산 돌길 가파르기만 한데 / 인가가 있구나 흰 구름 피어오르는 곳 / 수레 멈추고 단풍 숲 저녁을 아끼노니 / 봄꽃보다 붉구나 서리 맞은 단풍이여'.

당나라 시인 두목이 지은 유명한 풍경시 '산행'이다.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환영 만찬 석상에서 읊어 더 유명해졌다. 당시엔 북한과 연관시켜 풀이한 사람이 많았다. 봄꽃은 이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늦으니 한중 간 국교가 비록 늦었지만, 더 잘될 수도 있고 앞으로 잘 해보자는 뜻이라고 말이다.

이 가을의 난리가 겹치자 늘 보던 시구라도 시의 경계는 달라져 있었다. 늦가을 앙천산을 오르던 시인에게 인가는 반가웠겠지만 북악의 가을 아래 이를 갈지 않고 고함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싶고, 저녁과 서리 맞은 단풍에서 노년의 충만한 기쁨을 느낀 시인과 달리 천금 같은 시간을 쪼개 달려온 이들은 파렴치에 몸서리친 다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겨우 달포 남짓이다. 꿈길을 걷듯 붕 뜬 느낌으로 지낸 지도. 바닥없는 허공의 세월이 그렇다. 처음엔 추락하는 느낌, 말의 세계가 와르르 무너진 느낌이었다. 이 나이 먹도록 지탱해온 무언가 쑥 빠져나간 허망함은 길었다. 그리고 이 가을은 차분함을 잊어 저답지 않은 계절이 되고 말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촛불의 바다, 말이 무너진 세계에 촛불의 너울이 일렁인다. 누군가에게 저 빛은 불온해 보이겠다. 큰 너울이 일다 보면 태풍이 오리라는 것을 뱃사람은 안다. 오래된 지혜이다. 술렁임은 본래 가을에 속하지 않는 것일 텐데 이 가을은 태풍을 미리 담은 바다처럼 일렁인다. 고요한 술렁임, 반어이다. 반어의 원어인 아이러니는 그리스말 '에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에이론은 그리스 희극에서 알라존과 짝을 이루는 인물 유형을 가리킨다. 허풍선이나 편집증에 빠진 인물로 그려지는 알라존이 자기를 실제 이상으로 꾸미는데 반해, 에이론은 자신을 비하하는 인물 유형이다. 시대와 상관없이 알라존과 에이론이 뚜렷해야만 성공적인 희극이다.

"희극에서 편집증에 사로잡힌 방해꾼 캐릭터의 특징은 단순한 위선보다 자기 인식이 부족한 경우가 더 많다. 그들은 거의 언제나 기만적인 캐릭터이다. 한 등장인물이 득의양양한 채 독백할 때 바로 옆에서 다른 등장인물이 관객을 향해 신랄하게 방백을 하는 어수선한 희극 장면은 에이론과 알라존의 싸움을 가장 순수한 형식으로 보여주며 관객도 에이론 쪽에 동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캐나다 문학비평가 노스럽 프라이의 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불온한 이 가을이 가을의 비극이 아니라 왜 겨울에 속하는 아이러니인지 까닭이 분명해 보인다. 촛불의 바다에 넘쳐나는 풍자와 해학이 왜 독백을 넘어선 방백이며 왜 우리 마음 깊은 곳을 찌르는지도 분명해 보인다. 전래되는 들놀음에서 보듯 이 가을의 모든 축제, 놀이, 풍자, 해학도 오래된 지혜가 낳은 것이리라.

'금관성 비록 즐거운 곳이라지만 / 서둘러 고향 돌아감만 못하리 / 촉으로 가는 길의 어려움이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어렵구나 / 돌아서 서쪽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 쉰다'. 당나라 시인 이백의 유명한 시 '촉도난'이다. 촉은 중국 쓰촨의 옛 이름이고 금관성은 쓰촨의 중심 도시 청두의 옛 별명이다. 장안을 떠나 아슬아슬한 잔도를 통해 쓰촨 청두로 들어가던 이백의 마음은 도리어 고향을 향해 있다. 이 시의 경계도 두목의 산행처럼 달리 보인다.

이 가을의 희극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이는 데는 에이론의 역할이 부족했다기보다 알라존의 일이 아직 남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빨리 끝내고 싶은 이 가을 축제의 결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했듯, 알라존의 다른 이름은 파르마코스이다. 파르마코스, 속죄양. 그러나 이 가을은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기 때문에 우리의 파르마코스는 추방될 것이다. 우리는 축제를 앞당겨서 치르고 있는 셈일지도 모른다.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