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2일 밤 9시경. 습관처럼 열어본 휴대전화에는 처음 보는 듯하면서도, 왠지 낯익은 전화번호의 문자 메시지 한 통이 와 있었다. 불길했다. 절대 열어 보고 싶지 않았지만, 벌써 몇 시간 전에 도착한 문자다. 저 메시지 함 안에서 무엇이 날 비웃고 있을지 나는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하나, 둘! '… 운영상의 문제로 말미암아 정상적인 진료에 차질을 빚게 되어 사죄 드립…' 뭔가 잘못됐다!
급하게 여기저기 검색을 해 봤더니, 내가 4월부터 교정 치료를 받던 치과가 돌연 폐업신고를 하고, 일방적으로 문을 닫아 버렸단다. 그리고 나는 정기 진료 일을 불과 이틀 앞두고, 달랑 한 통의 문자로 그것을 통보받은 것이다. 관할 보건소에 폐업 신고가 된 것도 같은 날이라고 하니, 이 사람들, 참 기민하다. 병원이 '먹튀'라니! 요즘 기망과 농단이 유행이라도 되나 보다. 현재까지 피해자는 3000여 명에 달하고, 피해 규모 또한 60억~9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참, 야무지게도 박박 긁어가셨다. 가장 심각한 것은 다수의 환자가 그동안 전혀 잘못된 진료를 받아 왔다는 것이다.
나도 막장 드라마 한 번 써보자. 금전적,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준 나쁜 놈이 있긴 하지만, 그놈은 행방이 묘연하고,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없다. 잡는다 하더라도 보상받을 가능성은 희박하거나, 아예 없다. 사회 정의 실현의 차원에서 법에 따라 처벌은 꼭 받게 하고 싶은데, 알다시피 서민일수록 법은 너무 멀리 있고, 까다롭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나쁜 놈이 당장 내 눈앞에 있는 게 아니니, 시간이 지날수록 허구적 인물에 가깝게 느껴진다. 대상을 잃어, 갈 곳이 사라진 분노와 상처의 고통은 계속해서 내재적으로 잠재 된다.
그런데 옆에서 한 무리가 자꾸 나댄다. 시끄럽게 들쑤시고 다니면서, 앞뒤 맥락도 없이, 설쳐 대는 것을 보니, 지금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 상황파악이 전혀 안 되는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저들은 예의도 없다.
과녁을 잃었던 분노의 화살이 각도를 다시 계산하고, 궤도를 수정한다. 활줄을 떠난 화살은 어딘가에는 반드시 꽂혀야 하기 때문이다. 즉, 실체가 모호한 나쁜 놈에서, 관계가 가능한 현실적 무례한 놈들로 불이 옮겨붙는 것이다. 막장 드라마의 절정은 지금부터다. 분노를 규합하여, 정의가 무엇인지 증명해 보일 대상은 버젓이 따로 있는데, 어이없게도 피해자들끼리 서로 물고, 뜯고, 싸우게 되는 새로운 전개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 난센스하고, 아이러니한 블랙 코미디는 끝내 파국으로 끝나고야 만다. 누구도 원치 않던 결과다.
하지만, 그놈! 이런 결말을 고대했던, 그 나쁜 놈만은 유유히 모히토 가서 몰디브나 한잔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의 임무는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를 양심이나 죄책감 따위는 세월에나 던져보자. 눈먼 시간이 그 미끼를 확 물기만 하면, 어느새 모든 것은 아주 잊힌 일이 될 것이다." 뭐, 이딴 생각이나 하면서 말이다.
일의 수습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사람일수록, 허무함이나 허탈감은 더욱 강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적 인생관은 강력한 교육을 통해 대물림 될 것이다. "아가, 아무도 믿지 말아라! 그리고 만약, 예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모두에게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다면, 아이야, 결코 앞장서지 마라! 앞에 선 놈이 제일 먼저 총 맞아 죽는 법이다. 선량한 너의 책임감을 고마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차라리 그 시간에 한 푼이라도 더 건질 궁리를 하여라. 돈이 인생의 갑이고, 재력이 능력이며, 선함과 악함은 그것들의 지배를 받으니, 돈은 눈에 보이는 신이라 하였다…."
무대와 등장인물이 다를 뿐이지, 오랜 세월 신물 나게 반복되어 온 레퍼토리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을 직접 마주하고 싶지는 않다. 희망하는 이 드라마의 마지막 반전이자, 감동 포인트는 바로, 정의로운 외침의 등장이다!
환자가 돈으로 보이고, 돈이 숫자로만 보이는 먹튀한 자들아! 고소, 고발, 소송 뭐든 해보라는 뻔뻔한 당신들을 두고, 우리가 쉽게 낱알처럼 흩어질 것을 기대하지 마라! 분노가 목표와 대상이 뚜렷해지면 어떻게 되는지 예습이라도 해두길 바란다! 삼천 명을 울렸으니, 삼천 눈물의 대가를 어디 한 번 치러 봐야 하지 않겠어! 이봐, 자네들, 이 겨울 느긋하게 따뜻한 커피나 즐기기는 다 글렀다고, 친구! 우리, 화났어!
연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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