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 한 해의 끝자락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소유한 것은 시간뿐이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에게도 시간은 있다 했는데, 얼마나 쏜살같이 달아나는 시간인지 해마다 이맘때면 깜짝 놀라곤 한다.

올해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더욱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피하고 싶은 일들을 겪느라 줄곧 어수선하게 지냈고, 몇 달 전부터는 박근혜 정부의 민간인에 의한 국정 농단으로 날만 새면 또 다른 논란거리가 쏟아져 나오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만 그랬던 건 아닐 것이다. 특히 이번 사태에 대해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분노와 불길함과 혼란 속에서 일상에 안착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쉬 납득할 수 없는 이 이상한 상황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 속에서 며칠 후면 '새해'라는 이름의 또 다른 날을 맞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새해'라는 이름은, 그날 떠오르는 태양은, 마치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무엇이기라도 한 듯 희망을 품게 하는 힘이 있다. 그날을 시작으로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새 희망을 품어보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절망적인 순간에도 희망을 붙잡고자 하는 존재들이다. 옛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희망적인 결말을 맞곤 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이범선의 '학마을 사람들'이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6·25전쟁까지 고통으로 점철된 시대를 살면서도 삶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인간상을 그린 것이나, 마가렛 미첼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딸을 잃은 후 그토록 자신을 사랑해주던 남편마저 떠나버린 상황에서도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여주인공을 창조한 것도 그 바람 때문이다. 정호승 시인은 아예 스스로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개인이든, 국가든 희망을 잃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희망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위기를 겪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무릎을 꿇기보다 악착같이 버텨내 오늘의 모습을 이뤘다.

지난한 세계 역사 속에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국가와 민족이 많다. 그러한 비극은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민족은 비교적 운이 좋았다. 수많은 위기의 순간을 무사히 지나 이만큼 발전해온 것이다. 지금 우리는 또 다른 위기 앞에 서 있다. 예상 밖의 인물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미국이나 사드 배치 문제로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중국과의 관계를 잘 풀어나가야 할 중대한 시점에 생긴 국정 공백은 자못 불안하다. 자신들을 누가, 왜 뽑아주었는지 잊어버리고 국가의 미래보다 당리당략에 얽매인 정치권 인사들의 한심한 작태는 불안감을 달래주긴커녕 기름을 붓는다.

유례가 없는 조류인플루엔자의 창궐과 물가불안, 잊을 만하면 전해오는 지진동 등, 한꺼번에 우리를 불안으로 몰아넣는 이 상황들도 결국은 우리가 이겨내야 할 진통이며, 더 나은 단계로 상승하기 위한 과정이리라.

경제용어 중에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라는 말이 있다. 캐나다의 저술가 말콤 글래드웰이 쓴 용어다. '작은 변화들이 어느 정도 기간을 두고 쌓여, 작은 변화가 하나만 더 일어나도 갑자기 큰 영향을 초래할 수 있는 상태가 된 단계'를 말한다. 즉, 다음 단계로의 도약은 느닷없이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 서서히 무르익다가 임계점에 이르면 한꺼번에 변화를 촉발한다는 것이다.

그런 일은 우리 일상 속에서 흔히 일어난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데도 좀처럼 성적이 오르지 않던 학생이 마침내 상위권에 진입하는 경우, 잘 못하는 운동이지만 꾸준하게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체력이 한 단계 상승한 걸 느끼는 것, 부진한 사업 실적에도 묵묵히 외길을 가던 사업가가 승승장구하게 되는 것이 바로 '티핑 포인트', 마법의 순간을 만나서이다.

나는 소설을 쓰다가 가끔 그런 일을 겪는다. 마감 날짜는 목을 죄는데 소설이 좀체 써지지 않아 머리를 싸맬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책상을 떠나 생각의 끈을 붙잡고 산책을 하거나 타인의 소설을 읽으며 사유를 거듭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매듭이 풀린다.

이처럼 모든 상황 속에는 반드시 극적인 변화의 순간이 숨어 있다. 그것은 결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곰삭은 김치처럼 서서히 무르익는 시간을 충분히 거친 후라야 가능하다. 설사 벼랑에 서 있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꾸준히 해결책을 모색하다 보면 마침내 반전의 순간을 맞게 되는 것이다. 때로 현실이 암울할지라도 희망을 버리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그래서다.

며칠 후면 새해의 태양이 떠오른다. 그 찬란한 빛에 의해 뒤숭숭한 현실의 어두운 그림자가 거두어지길 고대한다.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바로 그때, 또 한 번 우리에게 마법의 순간이 찾아와 위기를 넘어 더 발전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을 것을 바라고, 또 믿는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