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낯선 모습이어서 헷갈리기도 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의혹 국정조사 청문회를 지켜보면서다. 아마 상당수가 비슷한 생각을 했을 법하다. 국조 특위 새누리당 비박계 위원들의 활약상 때문이다. 과연 여당 위원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질문은 거침 없었고 때로는 일부 야당 위원을 능가했다. 친박계 위원과는 날 세워 대립하면서 야당 위원과는 공조하는 모습도 보였다. 전체적으로는 김이 빠진 청문회였지만 이들마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심지어 비박계 황영철 위원은 5차 청문회 자리에서 "곧 새누리당을 떠날 황영철"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기까지 했다. 이런 비박계를 보면서 친박계는 또 한 번 '배신의 정치'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친박계의 눈에는 비박계가 촛불 민심에 편승한 기회주의자로 보일 수밖에 없다. 친박계야 이미 공공의 적이 됐으니 그들이 뭐라든 관심 둘 일이 아니다. 어쨌든 사사건건 으르렁거리던 한 지붕 두 가족은 끝내 결별의 길로 접어들었다.
비박계의 창당이 가시화되면서 대격변이 불가피하게 됐다. 내일 분당을 공식 선언하고 원내교섭단체로 등록한다. 내년 1월 20일을 전후해 신당을 창당한다는 계획이다. 1차 탈당에 합류한 의원 외에 추가 탈당 가능성이 있어 세가 불어날 수도 있다. 지난 22일 한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8.7%로 기존 새누리당의 13.2%를 뛰어넘기도 했다. 친박계와 탈당파 간 '보수 적자 전쟁'이 본격화한 것이다.
친정을 뛰쳐나온 비박계로서는 친박계와의 차별성이 생명이다. 그래서 '보수신당'이라고 정했던 임시 당명을 가칭 '개혁보수신당'으로 확정했다.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 개혁의 의지를 더 담아야 한다는 유승민 의원의 제안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유 의원은 "안보는 정통보수를 견지하고 민생 경제 교육 복지 노동 등은 새누리당 노선보다 훨씬 개혁적으로 가고 싶다"고 당의 향후 노선 방향을 설명했다. 기존 경제 정책의 전반적인 '좌클릭'을 예고한 셈이다.
청문회를 통해 야당 못지 않은 활약을 보여준 비박계의 의지를 보면 당연한 방향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새로운 보수를 지향한다 해도 '개혁'과 '보수'라는 단어의 어울림이 어색함은 어쩔 수 없다. 비록 1주일 만에 해산했지만 친박계의 결사체 이름이었던 '혁신과 통합 보수연합'이 연상되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주장할 법하다. 그렇다 해도 '혁신보수'나 '개혁보수'라는 말에서 그다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다.
안보는 정통보수, 민생 등은 '좌클릭'이라는 방향도 그 연장 선상에 있다. 새누리당에 표를 주기는 싫고 개혁적인 보수가 나타나길 바라는 유권자를 겨냥했겠지만 애매하긴 마찬가지다. 국가 안보에 민감하면서 경제민주화에도 관심이 많은 표심? 말은 그럴듯 해도 이런 표심이 다양한 보수 스펙트럼의 어디쯤에 있는 건지 선뜻 짚히지 않는다. 마치 물과 기름을 섞어놓은 모양새다. 뭔가를 바꿔보겠다는 의지를 모를 바 아니나 잘못하다간 이도 저도 아닌 잡탕밥이 될 공산이 크다.
이런 비박계가 대선 후보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영입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김무성 전 대표는 창당준비위 회의에서 반 총장 영입을 공식화한 바 있다. 유력한 대선 후보가 없는 비박계로서 불가피한 선택이긴 하다. 하지만 사실 반 총장의 코드는 오히려 친박계 쪽과 가깝다. 비록 친박계의 구애에도 새누리당을 선택할 가능성은 적지만 비박계로 향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반 총장의 성향이 '좌클릭'하려는 비박계와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 총장 영입에 사활을 건 비박계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지 근본적인 물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보수층에서는 친박계와 경쟁하고 중도와 진보층에서는 국민의당과 경쟁하는 이상한 모양새다. 설혹 대선 후보로 모셔오는 데 성공한다 해도 반 총장이 '좌클릭'을 반대한다면 '도로 새누리당'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개혁보수'니 안보는 정통보수, 민생은 '좌클릭'이니 하는 모호한 정체성의 태생적 한계인 셈이다.
대통령 탄핵 정국과 청문회 과정에서 비박계의 역할이 중요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비박계 스스로 국정이 이토록 파탄 지경이 된 데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비록 친박계와 다툼이 없지 않았지만 집권여당의 우산 아래 누릴 것은 다 누린 웰빙 정치인이란 비난도 그 때문이다. 어찌됐건 비박계는 그들 말대로 진정한 보수로 거듭날지 엄중한 심판을 앞두고 있다.
지금처럼 양쪽에 다리를 걸친 애매한 정체성으로 웰빙 체질을 벗을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일시적으로 정치 생명을 유지해 보려는 속셈에 표 될 만한 이것저것을 갖다붙여서는 곤란하다. 친박계가 기회주의자라고 몰아붙이는 것이야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이다. 촛불 민심에게서마저 같은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논설위원 jjk@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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