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면 새해다. 그런데 우울한 세밑이다. 분위기가 잔뜩 가라앉았다. 하긴 성탄절을 전후해 거리에서 그 흔하디흔한 캐럴도 제대로 듣지 못했으니. 지난해 이맘때도 그랬을까. 문득 불경스러운 생각마저 든다. 설마….

요즘 쏟아지는 각종 경제지표는 신기록을 갈아치우기 바쁘다. 최악, 최저치,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고 수준, 금융위기 이후 처음…. 그러다가 딱 한 곳에서 숨이 멎을 뻔했다. 'IMF 외환위기 때보다 더한 것 같다'는 표현에서. 이 대목에서 문득 낡은 서랍 속에서 꺼내 보는 사진들처럼 '그때 그 시절'이 잇달아 등장한다. 1997년 11월 21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고 발표했다. 다음 장면은 익히 알려진 대로다.

국민은 자발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섰다. 멀쩡하던 기업들이 도산했고,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내몰렸다. 기자의 주변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폭풍우가 지나간 뒤 오랜만에 출입처에서 만난 대학교수 한 분은 "이거 축하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며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무슨 말씀이신지"라고 묻는 기자에게 그는 "그 엄청난 광풍 속에서 살아남았으니까"라고 답했다. 정말 그랬구나. 한동안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런데, 정말 요즘 돌아가는 모양새가 딱 그렇다. 1997년 당시 김영삼(YS) 대통령은 차남 현철 씨의 구속 무렵 국정에서 멀어졌다. 검찰은 '이빨 빠진' 살아 있는 권력을 향해 달려들었다. 집권 마지막 해 4분기 YS의 지지율은 6%였다. 이 역대 최저 기록은 박근혜 대통령이 깼다. 지지율 4%. '청와대 게이트'로 촉발된 국정 공백 사태를 보면 정말 판박이다. 국가적 컨트롤타워가 무너진 것은 1997년이나 지금이나 섬뜩할 정도로 닮았다. 아니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

국정 공백 사태는 계속 확산 중인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대처 과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AI로 살처분된 전국의 가금류는 2700만 마리를 넘어섰다. 가장 피해가 심한 산란계(알을 낳는 닭)의 살처분 숫자는 전체 사육 마릿수의 절반에 육박했다. 계란 하나 제대로 먹기 힘든 세상이다. 사태 발생 초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한국은행이 지난 27일 국회에 제출한 금융안정보고서를 보면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1300조 원에 달하는 가계부채가 '시한폭탄'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난 9월 말 현재 가계부채는 1295조8000억 원. 1년 사이 130조9000억 원이 늘어났다. 저금리 기조와 대출규제 완화 정책을 믿고 빚을 내 집 사기에 나선 결과다.

경제 대위기의 전조는 빈곤층에서 두드러진다.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인 이들의 지갑은 무서운 기세로 얇아졌다. 일용직이나 임시직 일자리마저 끊긴 결과다. 월소득 기준 하위 10%인 극빈층의 올해 3분기 가처분소득(수입에서 세금 등을 빼고 실제 쓸 수 있는 돈)은 고작 71만7000원. 지난해 3분기보다 16%나 줄었다. 수치상 '71만 원'이지 일자리를 잃어 소득이 아예 '0원'인 가계가 많다는 의미다.

환란의 쓰나미가 휩쓸고 간 뒤 1997년 12월 18일 치러진 제15대 대통령 선거. 김대중-이회창 후보 간 전국 표차는 1.6%의 초박빙이었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결정한 가장 큰 저울추는 그해 11월 21일 시작된 외환위기였다. 결국, 정치도 먹고사는 문제에서 출발하고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하튼 내년 봄이든, 여름이든 조기 대선은 불가피하다.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진행 중인 와중에 여권이 초유의 분당 사태를 맞았다. 정당·정파별 이합집산이 시작됐다. 대선 주자별 개헌 논의도 활발하다. 모든 움직임이 조기 대선을 정조준하고 있다. 그러나 먹고사는 문제가 차기 대통령을 결정할 것이다.

때마침 새누리당 분당으로 개혁보수신당이 뜨자 야권이 개혁 입법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린다. 새누리당 의원 수가 99명으로 줄어 신속 처리 대상 안건 지정, 이른바 '패스트 트랙'을 밀어붙일 의결정족수가 갖춰졌기 때문이다. 검찰이나 재벌 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서 촛불민심과 보조를 맞추겠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마당이다. 시민사회에서 강력하게 요구하는 개혁 입법을 성사시켜 위기의 한국 경제에 숨통이라도 틔웠으면 한다. 이는 촛불민심에 응답하는 또 하나의 길인 까닭이다.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