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만남 후에도, 그와 가장 자주 마주치는 곳은 시립 도서관이다. 우연히 집이 가까워 같은 도서관을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범주는 자주 겹친다. 내 쪽에서 가벼운 목례를 하면, 그쪽에선 언제나 다정스레 내 이름을 부른다. 응, 유리야, 또 보네. 그가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의식적으로 그의 책상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칸막이 너머로 간간이 움직이는 정수리와 어깨의 몸짓으로 무언가 맹렬히 써내려가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무엇을 쓰고 있을까, 여러 가지 상상을 해보지만 항상 떠오르는 장면은 그를 처음 목격한 어느 가을날, 사상으로 가는 버스에서 보았던 뒤통수뿐이다.

십 몇 년 전, 나는 스물넷이었다. 한낮의 텅 빈 버스엔 앞뒤로 앉은 그와 나 둘뿐이어서 그 뒷모습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하단에서 사상까지 가는 동안 그는 자주 버스 노선도를 흘끔거렸다. 콧날이 시원한 직선이었다. 나는 작은 선물 하나를 손에 쥐고 사상 어느 호프집에서 열리는 친구의 생일파티에 가는 중이었다. 그가 나보다 두 정거장 먼저 내렸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해도 잘생긴 코와 무스를 잔뜩 발라 번들거리는 헤어스타일 외엔 아무것도 남겨둘 게 없었다. 우연히 노선이 겹쳤을 뿐이다.

그러나 호프집에 들어서자마자 내 친구보다 그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친구들로 가득 찬 ㄷ자형 소파에 그가 앉아 있었다. 스물네 번째 생일을 맞은 친구는 그의 팔짱을 끼고 행복한 얼굴로 고백했다. 내 남자친구야. 언약식도 했어. 친구는 그가 서울 사람이고, S대에 다니고 있으며, 그녀의 생일 때문에 일부러 비행기를 타고 김해공항으로 왔고,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호프집까지 왔다고 했다. 그는 S대의 캠퍼스 라이프를 수줍게 풀어놓았다. 공부만 하느라 이런 술자리에 별로 낀 적이 없어 기분이 좋다는 이야기를 서툰 서울말로 하기도 했다.

당신, 나랑 같은 버스 타고 하단에서 여기까지 왔잖아, 라는 말을 쏟아붓지 못하게 된 나는 점점 메슥거려졌다. 나는 반 잔 정도 마신 소주를 화장실에서 게워내고 말았다. 그가 입을 여는 순간 알았던 것이다. 나와 같은 냄새가 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 콧속을 밀고 들어온 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풍기는 역한 냄새였다. 나는 거짓을 글로 쓰는 사람이라는 것, 그는 거짓을 말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게 우리 둘의 사소한 차이였다.

비행기 시간에 맞춰 자리를 뜬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그들의 거창한 이별 자리에서였다. 휘청거리며 걸을 만큼 살이 쏙 빠져버린 친구를 거들어 뺨이라도 때려주기 위해 몇 명이 함께 나섰다. 살기등등한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끝까지 거짓말을 했다. 사실은 S대가 아니라 I대이며, 재학 중이 아니라 휴학 중인 거라고. 하지만 그는 사실 중졸이었고, 부산 토박이였으며,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아 생활하는 서른네 살의 백수였다. 이름, 집 주소, 나이, 부모님의 직업, 가족관계까지,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 인간의 눈동자는 오히려 흔들림이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의 눈은 도박사의 그것처럼 표정이 없었다. 웃지도 울지도 않는 묘한 얼굴로, 그는 모든 것이 오해라고 침착하게 말했다. 지긋지긋한 악취마저 풍기는 그 장면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몇 달 후 도서관에서 그와 다시 마주치기 전까진 말이다.

나는 여전히 스물넷이었다. 그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유리야, 여기 웬일이니?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도서관을 나가 버렸다. 그러나 몇 달에 한 번씩 들르는 도서관에 그는 항상 있었다. 몇 년 만에 도서관에 들러도, 십 년이 흘러도 그는 도서관에 있다. 열람실에서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내 맞은편 어느 책상에 앉아 있다.

단골 도서관을 바꾸지 않은 것도 일상의 픽션을 향한 그의 열정에 포함되는 것일까. 가끔 몇 마디 나눌 때마다, 그는 자신의 I대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휴학을 하는 게 아니었다고, 그때부터 인생이 틀어졌다고 말하며 자신의 허언을 고집하는 그는, 물고기처럼 텅 빈 눈알로 이따금 도서관의 지붕 꼭대기를 멍하게 쳐다본다. 허언증 환자를 가두어 놓기에 도서관만큼 좋은 곳도 없을 것이다. 온갖 허언의 책이 견고하게 쌓인 성에서 왕 노릇을 하다 보면 가끔 진실의 통증이 잊히지 않을까. 나는 그의 희끗희끗한 정수리를 훔쳐본다.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다시 오심감이 밀려온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