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기형도 시인의 시 '빈집'은 그렇게 시작한다. 기형도를 아는 이라면 이 짧은 구절을 읽고 먹먹해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랑을 잃는 일은 한동안 자신의 감정과 정신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던 세계를 잃는 것과 진배없다. 세계의 상실인 것이다.
그런 참혹한 사건을 겪으면서도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시인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상실의 체험에서 반성이 시작되고, 뼈저린 자기반성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존재성을 뚜렷하게 증명한다. 시인이 심야 영화관에서 주검으로 발견되고 나서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이 묶어져 나오면서부터 '기형도'란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유고시집은 수많은 '문학청년'의 필독서가 되었다.
그러나 기형도 시인을 문학적 신화로 자리매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흔히 시인을 낭만적 주체나 초연한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작품 형식이나 주제에 상관없이 '시인'이라는 존재는 낭만적이고 신비적인 아우라를 머금은 실체로 둔갑해버리는 것이다. '시인'이 대중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경우는, 결코 '자연인'으로서가 아니다. '시'라는 텍스트가 환기하는 의미와 소통의 맥락을 통해서이다. 그러니까 창작주체로서 '시인'과 일반 시민이나 사회인으로서 '시인'은 같으면서도 분명 서로 다른 존재이다. 마치 법을 집행하는 법조인으로서 '판검사'와, 이들이 몸담은 법 집행 공간으로서 법원이나 검찰청에 근무하는 '공직자'를 구별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부산에 터를 둔 어느 시인단체가 있다. 어느 때부턴가 잡음이 끊일 새가 없다. 몇 년 전에 내부 갈등과 불화로 둘로 쪼개진 상태에서 따로 협회를 운영하다 최근 통합했다. 그런데 차기 이사장 선출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수십 년 동안 시 쓰기와 연구를 병행하며 시단(詩壇)에 입지를 다져온 시인이 이사장으로 추대받았는데, 협회 사이트를 통해 얼마 전 사의를 표시했다.
내가 그 단체에 속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어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여러 해 동안 직간접적으로 단체의 소식을 들어온지라 애석한 감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그분이야말로 실추한 단체의 위상과 전통을 회복하는 데 적임자이기 때문이다. 속 깊은 사정이야 나도 모르고, 눈 감고 지나갈 수도 있다. 그런데 협회 사이트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몇몇 회원의 글을 읽으면서 확인하며, 어떤 회한이나 씁쓸함을 토로하지 않고는 배길 도리가 없음을 고백한다.
분쟁에 휘말린 당사자들의 견해에 뜬금없이 내 의견을 보태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예전에도 협회에서 표출된 눈살 찌푸리게 한 숱한 민낯이 지역 언론의 보도로 공개된 적이 있다. 어떤 조직이든 집행 과정이나 활동의 면면들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공정성과 투명성일진대 툭하면 고소와 고발이 난무하면서 상대방을 죽이기에 서슴지 않는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이 쓰는 시가 얼마나 진솔하겠으며, 또한 얼마나 시인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창작행위로 이어지겠는가.
이들은 대개 시민과 함께 하는 문학행사장에서는 고상한 시인연한다. 그리고 온갖 감투를 쓰고 행세를 하고 다니면서 정작 시 쓰기에 고심하는 '시인'의 얼굴에 똥칠을 마다치 않는다. 이들에게 뼈를 깎는 반성과 참회의 눈물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적어도 시인인 만큼 자신들의 행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기실 시인들의 단체나 조직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단체나 조직의 간판을 내걸고서만이 자신을 시인으로 확인한다면 이야말로 '시인'의 가면을 쓴 정치꾼이요, '문학'이라는 이름의 알리바이를 안고서 자신의 추한 욕망을 채우려는 모리배가 아니겠는가.
시인의 향기는 무리를 지어 온갖 판을 휘젓고 다니면서 행세하는 마당에서는 악취로 돌변한다. 기형도는 광장에서 얻은 상실감을 뼈저리게 체득하면서, 그 과정에서 생긴 절망과 공포를 자신의 내면으로 온전히 안고 갔을 것이다. 그래서 '빈집'이라는 시가 나왔고 수많은 독자에게 아직도 사랑받고 추억하는 시인으로 남았다.
시의 작품성이나 정조(情操) 혹은 시인의 유·무명을 말하는 게 아니다. 기형도를 들먹이며 작금 지역 시단에 벌어지고 있는 불미스러운 행태를 비판하는 까닭은 이렇다. 언제부터인지 '시인'이라는 직업군이 명품 옷이나 가방처럼 요란한 치장품으로 사람들한테 다가온 듯하다. 그래서 너도나도 알량한 문장력으로라도 시인이 되고자 한다. 그렇게 시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시는 뒷전이고 얼굴 알리기에 혈안이다. 또한 이런 '시인'이 삼삼오오 모여 저희끼리 세를 과시한다.
나는 이 모양새를 보며 기형도 시집 '입속의 검은 잎'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현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기형도의 시 세계를 이렇게 한마디로 표현했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아직은 흐리고 어둡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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