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 14일. 30년이 지났지만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박종철 군의 고문 치사일'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경찰이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의 후배인 서울대 언어학과 박종철을 불법적으로 체포해서 폭행하고,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을 가하다가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수사단 남영동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케 한 일을 일컫는다. 의인 박종철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도망자가 된 선배의 신변 안전과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것이다.
당시 경찰은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해서 전 국민의 공분을 샀다. 이 사건으로 폭압적인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숨죽여 있던 학생과 시민들이 일어섰다. 얼음장 밑으로만 흐르던 역사의 물줄기를 얼음을 깨고 솟구치게 한 자랑스러운 6월항쟁의 서막이었다. 2·7 박종철 열사 추도대회, 3·3 박 군 49재 및 고문 추방대회 등 1987년 6월항쟁은 부산 혜광고 출신 박종철 군의 희생으로 열렸었고, 함께 어깨 걸고 싸운 국민들은 6·29선언이라는 항복 문서를 받아냈고 승리했다.
양 김의 분열로 연말 대선에서 비록 전두환과 또 다른 군사쿠데타의 주역인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긴 했었지만, 6월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도정에서 큰 이정표다. 대통령을 체육관 선거가 아닌 국민들이 직접 뽑는 시대로 만들었고, 당시 만든 헌법과 6공화국 체제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나는 대학생 때 4·19혁명에 참여했고, 정치를 시작한 후 부마항쟁에 함께했고, 6월항쟁 때는 야당 국회의원으로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일원으로 독재정권과 맞서 싸웠었다. 30년이 흘렀지만, 나는 6월항쟁 때 최루탄 가스가 자욱했던 부산 남포동 서면 문현동 등의 거리와 '호헌 철폐' '독재 타도'라는 시민 학생들의 큰 함성을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어깨 걸고 함께했었던 사람들의 '직선제 쟁취'와 '민주화'를 갈망하는 눈동자들과 6·29선언 당일의 승리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사의 큰 획을 그은, 아니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꿔낸 6월항쟁. 그 후 우여곡절이 많긴 했으나, 단계적으로 한국 민주주의를 진전시켜낸 첫 시발점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 살아남은 우리 모두는 박종철에게 30년 동안 큰 빚을 지고 살아 온 셈이다.
부산시장을 했었던 나는 늘 부산시민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항도 부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개방성, 진취성, 도전 정신을 가진 시민들이 너무 좋다. 그중에서도 으뜸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6월항쟁과 박종철을 꼽는다. 6월항쟁 때 부산시민들이 전국에서 가장 오래,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것은 4·19혁명, 부마항쟁 등 역사의 고비마다 분연히 일어섰던 부산시민의 자랑스러운 기상을 우선 꼽아야겠지만, 박종철이 부산의 아들, 혜광고 출신이란 것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박종철 열사 30주기를 맞는다. 헌정질서 유린, 국정 농단 등으로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시민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고 있는 오늘, 나는 선배로서 전직 정치인으로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먼저 간 박종철 군에게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수많은 시민이 이 엄동설한에 벌써 세 달째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고, 고등학생들 심지어 중학생들까지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와 '이게 나라냐!'고 함성을 외치는 상황이 올 때까지 무기력하게 지냈던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보이고 때론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부산시민들이 당당하게 역사의 주역으로 나섰던 4·19혁명, 부마항쟁, 6월항쟁 등은 모두 미완의 역사였다. 지금 우리가 들고 있는 시민 촛불의 열정과 에너지를 잘 결집시켜 '새로운 대한민국'을 꼭 만들어서 박종철에게 빚진 30년의 부채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30주기를 맞아 사리암에서 그를 보내던 그날을 생각하니 또다시 눈시울이 저절로 붉게 물들어 온다. 아~ 우리 시대의 의인, 박종철.
전 부산시장·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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