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이 채워진 물 잔을 보고도 겨우 반만 남았다고 보는 대신 아직 반이나 남아 있다고 보라는 가르침은 흔히 긍정적 사고를 진작시킬 때 동원된다. 확실히 한 개인에 있어 긍정적 사고는 정신적 건강과 사회적 성공을 위해 유익하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자칫 현실에 엄존하는 불의에 눈감고 모든 것을 각자 마음의 문제로 전가시킬 위험이 있다.
그릇된 것을 그르다고 보지 못하고 상이한 관점의 문제로 얼버무린다면 그것 자체가 불의에 동조하는 행위다.
문제는 세상사가 그 옳고 그름을 단번에 판단할 수 있을 만큼 늘 명백하지는 않다는 데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옳고 그름이 명백한 사안마저도 통념이나 무지 혹은 불공정한 언론보도나 고의적인 왜곡에 의해 굴절된 상태로 우리 앞에 등장한다는 점이 문제다. 누가 봐도 정부의 잘못이 명백했던 세월호 사건을 그저 불운한 교통사고나, 아니면 유족들의 떼쓰기로 왜곡했던 주요 언론방송과 일부 국민의 악의가 우리의 건전한 상식과 판단을 어지럽히고 '세상이란 다 그런 거야'라는 저열한 현실논리에 젖어들게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어지러운 세상사를 가능한 한 공정하게 판단할 힘이다.
인문학이란 세상의 온갖 무지, 편견, 허위와 씨름하는 학문이다. 유럽 역사를 전공한 필자가 알기에는 인문학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인들이 사용하던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라는 라틴어 개념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학식과 교양을 의미하는 '후마니타스(humanitas)'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문으로, 당시에는 주로 고전어문학을 지칭했다. 고대의 주요문헌을 탐구함으로써 올바른 판단과 지혜, 그리고 정확한 표현과 설득의 능력을 배양할 수 있다는 믿음이 인문학의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후마니타스의 반대말은 바르바리타스(barbaritas), 즉 야만성이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도 마찬가지로 교양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상사가 각박해질수록 사람들은 현실의 삶보다 훨씬 고상한 것을 찾게 된다. 우리가 쓰는 '교양'이란 말은 독일어의 '빌둥(Bildung)' 개념을 개화기의 일본인들이 번역한 것인데, 원래 그것은 문명국가의 국민 개개인이 인류와 민족의 정신적 자산을 전수받음으로써 개개인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넘어 보편적인 가치관과 사고력을 체득하게 되는 '자기함양'의 과정 전체를 의미했다. 예컨대 '빌둥스라이제(Bildungsreise)'는 대문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처럼 개인의 정신적 고양을 위한 교육적 여행을 의미했다.
베레모를 쓰고 고대 로마제국의 폐허 앞에 걸터앉아 역사의 무상함을 사색하는 괴테의 유명한 초상화 속 자태는 브랜드 아웃도어를 갖춰 입고 연방 셀카를 찍어대는 우리네 '투어'와는 얼마나 다른가. 참된 교양이란 개인적인 만족이나 유불리의 계산을 넘어 보편적인 사고를 할 힘을 말한다. 교양이 나 자신과 주위의 세계를 돌아볼 수 있는 분별력에 이르지 못하고 그저 고상함을 과시하는 차원에 머문다면 값비싼 액세서리와 다를 게 무언가.
보편적으로 사고하는 힘을 기르는 데 있어 최대의 난관은 오래도록 우리를 기존 현실에 어긋나지 않도록 길들여온 '순응주의'를 떨쳐내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소위 '왕따'가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남들과 다른 판단을 하는 사람을 좀처럼 용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통일이 필요한가요?' '고구려가 왜 한국사에 속하나요?' '왜 국민이 주권을 지닌다는 거죠?' '경제발전이 과연 좋은 건가요?' '1+1=2가 될 필연적인 이유가 있나요?'라는 식의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학생은 태양이 지구 위를 도는 것이 정말 맞는지를 의심했던 유럽 중세기의 학자처럼 일종의 파문, 즉 멍청이 혹은 괴짜 취급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지만 중세 교회가 강요하던 순응주의, 맹종, 진리 독점 등에 맞서지 않고서 어찌 근대 과학문명이 태동할 수 있었겠는가?
"사페레 아우데(Sapere aude)!", 즉 서구의 근대 과학혁명을 사회 · 정치적 혁명으로 확대하고자 했던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의 "감히 생각하라!"는 슬로건은 21세기의 우리에게 여전히 혁명적이다. 상식을 의심할 수 있는 지성과 외로움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배양하기는커녕, 사실상 그러한 바탕 위에서 창조된 서양의 과학과 문명마저도 오히려 하루빨리 습득하여 뒤쫓아가야 할 의무사항으로 받아들인 우리의 풍토 속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꽤 사치스러운 일이다.
주어진 정보를 가능한 한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이면 될 일이지 비판이나 의심 따위는 시간 낭비일 뿐이며 심지어 불온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대통령 탄핵의 시대에 이르러 우리의 통념과 순응주의도 함께 탄핵당하지 않았는가. 독립적으로, 그럼으로써 보편적으로 사고할 수힘이야말로 좀 더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원동력이며 이러한 힘을 길러주는 것이 바로 교양의 원천인 인문학이다.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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