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없이 어찌 자식이 있으랴. 엊그제 기제사를 지내서일까. 나이 하나를 또 먹어서일까. 새해 들어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립다. 애오라지 가족부양을 위해 온갖 세파 온몸 홀로 막아내셨던 분. 못난 자식 종아리 치시곤 밤새 더 아파하셨던 분. 내 아버지셨다. 아버지는 세상 떠난 후에나 비로소 그리워지는 존재인 걸까. 김경호 노래처럼 가슴 깊이 묻어도 그 이름만 들어도 눈물 나는 존재. 아버지다.
어린 시절 내게 아버지는 늘 두려운 분이셨다. 태산보다 높고 든든한 분이셨다. 따뜻한 추억을 남겨주신 분이기도 했다. 온 가족을 불러놓고 텀블링을 하며 즐거움을 주곤 하셨다. 물구나무를 서보라며 내게 엄명하시기도 했다. 마을 대표 씨름선수이셨던 터라 씨름도 가르쳐 주셨다. 때론 귀찮았던 그때 그 추억은 이제 나를 포근히 감싸주다가 어느새 눈물이 돼 흐른다.

요즘 애들에게 두려운 아버지는 없다. 가족사진만 봐도 알 수 있다. 예전에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함께 앞줄에 앉았었다. 목에 잔뜩 힘을 준 채 말이다. 뒷줄은 엄마와 아이들 몫이었다. 이런 모습은 어느 집이든 똑같았다. 이젠 달라졌다. 가족끼리 나란히 한 줄로 앉은 아버지는 그나마 행복하다. 핵가족 시대라지만 두 줄로 사진을 찍기도 한다. 앞줄은 엄마와 아이들 차지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안은 채 말이다. 뒷줄은 아버지 자리다. 가부장 권위는 사라졌다. 부부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아버지와 자녀 간에도 상명하복이 먹히질 않는다.

최근 청소년 범죄가 그칠 줄 모른다. 날로 잔인해지는 추세다. 가족의 갈등과 붕괴도 정말 심각한 지경이다. 이를 두고 아버지 상실시대 탓이라며 혀를 차는 이가 적지 않다. 아버지 역할을 재조명하는 연구들도 부쩍 눈에 띈다. 학교공부도 경제교육도 아빠가 가르칠 때 효과가 더 크다고 한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신생아 1만700명을 33세까지 추적했다. 그 결과 돈과 명예를 얻고 행복한 가정을 꾸린 사람들의 공통점이 발견됐다. 아빠와 친밀한 사이로 자랐다는 점이다. 아빠랑 운동하며 사회성을 배웠기 때문이다.

애들은 놀면서 사귄다. 잘 노는 아이가 또래에게 인기를 끌고 리더가 된다. 어린 자녀에게 부모는 놀이의 계획자이고 안내자다. 엄마는 아이랑 소꿉장난하거나 책 읽어주는 일에 능하다. 이런 정적 놀이는 자녀의 정서순화에 좋다. 아빠는 아이랑 거칠고 빠른 신체활동을 즐긴다. 이런 동적 놀이는 자녀의 사회성과 자긍심을 기르는 데 좋다. 유아기 자녀는 동적 활동을 훨씬 더 좋아한다. 엄마들은 힘겨워서도 방법을 몰라서도 못하는 신체활동이다. 아빠들의 전문 분야다.

아버지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 가부장적 권위와 상명하복 서열을 꿈꾸는 건 아니다. 그래서 아버지 역할과 이미지를 리모델링하는 중이다. 이를테면 '토이 대디(toy daddy)'가 있다. 토이 대디는 애들이 아빠를 장난감처럼 막 대하는 존재가 아니다. 자녀랑 친근하고 스스럼없이 놀며 소통하는 아빠다. 딸애의 모든 일에 극성인 딸바보 아빠도 있다. 엄마 역할까지 척척 해내는 '대미족(dammy, daddy+mommy)'도 많아졌다.

새해엔 아버지를 위한 굿 뉴스만 들려오길 바란다. 애완견보다 푸대접받는 아버지. 가족들에게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아버지. 이런 얘긴 이제 그만 두자. 개그 프로에서든 현실에서든 말이다. 그건 아버지는 물론, 가족도 사회도 모두 불행해지는 일이니까. 아버지들이여, 이제 그만 고개를 들어라.

부산교육대학교 체육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