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생필품 가게에 들렀더니 한쪽이 소란스럽다. 무슨 일인가 귀를 쫑긋 세워보니 40대쯤으로 여겨지는 가게 주인과 노인 한 사람이 한창 입씨름 중이다. 처음에는 가벼운 설전이 오가는가 싶었는데 급기야 언성이 높아졌다. 뒤숭숭한 시국이 안타까웠던 노인이 혼잣말 삼아 가게 주인에게 한마디를 했던 모양. 그냥 흘려들었으면 될 것을 젊은 주인이 맞받아치면서 일이 커져 버렸다.

대충 주워들은 말은 이렇다. "아니, 제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물러나라 하는 게 민주주의 국가냐. 탄핵이 말이 되냐고" "잘못한 게 있으면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할아버지라도 내려가야죠" "대통령은 왕이나 매한가진데 그래서는 안 되지" "아이고, 어르신. 지금이 어디 조선시대입니까". 더 귀동냥하다가는 내 할 일 못 하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가게를 나왔다. 앞으로 저 가게는 단골손님 한 사람 잃겠구나하는 실없는 상상을 하며.

잘 모르는 사람끼리 정치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건 우리 사회의 불문율이나 마찬가지다. 근데 요즘에는 이런 금기가 많이 사라졌다. '최순실 국정 농단' 의혹이 불거지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무능함이 만천하에 드러나고부터는 더욱 그렇다. 입 달린 사람치고 한마디 않는 이는 드물다. 민심의 척도라는 택시기사들의 입은 더 적나라하다. 작취미성이라 조용히 목적지까지 가려는 손님에게 먼저 나서서 귀가 솔깃한 온갖 세상 흐름을 전해준다. 시국과는 담을 쌓고 지내려던 무지렁이들이 정치판에 관심을 갖도록 만든 게 이번 정권의 가장 큰 업적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이런 일을 만들고도 정작 박근혜 대통령은 초지일관하는 자세다. "최순실이 몰래 저질렀을 뿐 나는 모른다" "오래전부터 누가 이런 일을 기획하고 관리했다"며 억울함을 토로한다. 때로는 분노의 목소리도 높인다. 하도 애절해 진짜 죄없는 사람 잡는 게 아니냐는 걱정까지 들 정도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바람과 달리 정국은 조기 대선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시계'가 3월 중순에 멈출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서다.

박한철 헌재 소장은 늦어도 3월 13일까지는 박 대통령 탄핵에 대한 최종 결정이 내려져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자신의 임기가 오는 31일 끝나고 이정미 수석재판관도 3월 13일에는 물러나야 한다는 상황을 고려한 일정이다. 정치권 역시 헌재의 이런 방침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박 대통령 탄핵을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탄핵이 안 되면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라는 야당 정치인의 말은 너무 앞서간 것이지만 국민들의 심정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듯하다.

대통령이 탄핵되면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뽑아야 한다는 게 우리나라 헌법 조항이다. 따라서 헌재의 일정대로라면 5월 초순 내에 대선이 실시된다. 일부에서는 5월 초에는 석가탄신일 등 휴일이 많아 대선이 4월 말로 앞당겨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어떤 경우이든 대통령 탄핵이 결정되면 화창한 봄날에 투표를 하는 '벚꽃 대선'이 이뤄진다.

대권주자들에게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짧은 시간 내에 고득점하려 벼락치기를 마다않는 수험생 신세가 된 셈이다. 서로의 계산에 따라 이합집산이나 합종연횡도 잇따를 게 분명하다. 정치인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장삼이사들 역시 해야 할 게 있다. 수많은 잠룡(潛龍) 가운데 누가 하늘로 날아 오를 수 있는 익룡(翼龍)인가를 구별하는 일이다. 몸을 낮추고 때를 노리는 잠룡까지는 봐줄 수 있다. 그런데 용은 고사하고 지렁이만도 못한 인물들은 과감하게 걸러내는 게 마땅하다.

개인 생각이야 그렇다지만 설이 되니 슬그머니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안팎으로 하도 민감한 시기에 가족·친척들끼리 얼굴을 맞대야해서다. 의절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중한 자리에서 정치 이야기를 꺼냈다가 얼굴을 붉혔던 기억도 새삼 떠오른다. 서로가 조심하겠지만 한순간이라도 대통령 탄핵 등이 화제에 오른다면 제각각 가슴에 담고 있는 생각이 봇물처럼 터져나올 게 분명하다. 올해는 특히 설 분위기가 심상찮아서인지 언론매체나 인터넷상에는 '명절 잘 보내는 방법'의 첫 순위로 정치 이야기 금지를 유별나게 거론하고 있다. 고부 간 갈등이나 자녀들의 결혼·취직 문제 등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추세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올 설에는 여느 명절과 달리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적당히 양보하고픈 마음이 쉽게 들지 않는 이가 많을 듯하다. 지금과 같은 황망한 꼴을 두 번 다시 겪지 않으려는 건 인지상정이다.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의 당부대로 설에 대한민국을 바꾸자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까지는 힘들더라도 현 대통령처럼 무능한 이는 다시 뽑지 말라는 말 정도는 해야 직성이 풀리지 않겠는가. 그래야만 다가올 추석에는 나라 걱정 없이 맘 편하게 훈훈한 덕담을 나눌 수 있을 터다.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