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 소용돌이의 정치'라는 책에서 그레고리 헨더슨은 모든 인자가 원자화된 형태로, 위로 중앙으로만 향해 빨려 올라가는 거대한 소용돌이로 우리 사회를 설명했다. 세계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우리의 고착화된 중앙집권화와 수도권 일극 집중화는 그의 소용돌이 모델에 딱 들어맞는 사회현상이기도 하다.
지금의 세계적 흐름은 수평적, 수직적 국가 재구조화이다. 선진 각국은 국민국가 중심에서 시장과 시민사회의 확장이라는 수평적 재구조화를 경험한 지 오래됐고,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로의 권한 이양이라는 수직적 재구조화 물결은 프랑스, 일본의 지방분권 개헌과 분권 개혁 등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분권 현주소는 여전히 답보상태이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지방정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지방세의 비율은 20%로 '2할 자치'에 불과하며 지방의 재정자립도는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 지자체 공무원의 정원과 조직도 중앙에서 통제받고 있으며 조례의 법적 효력도 매우 낮아 자치입법권도 심각한 제약을 받고 있다. 사회복지 등 각종 정책도 지방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중앙이 틀어쥔 예산 몇 푼을 더 받기 위해 지방은 정부부처에 올라가 통사정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분권화된 국가이면서 주민참여의 직접민주제가 발달한 스위스에서 주민이 사는 법을 보자. 인구 850만 명의 스위스는 연방제 국가로 광역지방정부인 칸톤, 기초지방정부인 코뮌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정부는 과세권이 있고 연방:칸톤:코뮌의 세수가 3:4:3으로 지방정부가 70%의 세수를 확보하고 있어서 우리나라 국세와 지방세 비중인 8:2와 정반대의 구조이다. 일 년에 수차례 주민들은 투표소를 찾고 최소한 수십 건 이상의 연방 및 지방정부의 법률안과 결의안 등에 대해 의사를 표명해야 한다. 주민총회가 있는 대부분의 코뮌에 모든 시민은 주민총회에 직접 참석해야 하며 일부 코뮌에서는 불참하면 벌금도 내야 한다. 평균인구 3500명의 코뮌정부의 전담 공무원은 2명 정도이며 많은 행정사무가 약간의 행정수당을 받는 자원봉사의 시간제 공무원들에 의해 처리된다. 사회복지도 사회보험은 연방, 사회부조는 광역, 사회서비스는 기초정부로 역할 분담이 되는 등 사무의 구분이 명확하며 복지서비스도 각 지역의 특성에 맞게 추진된다.
최근 우리의 정국은 부패와 반민주적 적폐를 해소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강력한 국민적 열망을 끓어오르게 하고 있다. 열망의 방향 중 하나는 권력구조 개헌이고 다른 하나는 지방분권 개헌이다. 이번 대선 이후 차기 정부에서는 민주주의 발전에 너무나도 중요한 지방분권 개헌을 반드시 국민이 참여하는 형태로 진행하여야 한다. 새롭게 개정된 헌법에는 대한민국이 '지방분권 국가'이며 중앙정부는 국민으로 구성되고 지방정부는 주민으로 구성된다는 헌법의 기본원리와 질서가 포함되어야 한다. 주민 관련 행정사무도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지방정부가 우선하여 처리한다는 '보충성의 원칙'을 서구의 다수국가처럼 포함해야 한다.
이러한 조치가 이루어진 5년 뒤 분권국가 대한민국의 주민이 사는 방식을 상상해보자. 먼저 주민생활과 직결된 사안에 대해서는 광역정부와 기초정부의 역할이 커졌고 다양한 사안과 관련해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공청회와 주민투표를 해야 할 일이 훨씬 많아졌다. 광역정부는 경제와 일자리 등에 주력하고 기초정부는 주민생활과 관련한 일을 전담하며 대부분 정책은 정치권력에 의한 무리한 추진이 아니라 주민이 직접 참여한 계획대로 진행된다. 지방세로 주로 추진되는 지역사업에는 아무 때나 중앙에서 돈만 내려오면 보도블록을 교체해야 하는 일도 없어지고 주민의 감시로 꼭 필요한 일에만 재정이 집행된다. 청소년의 학습과 취미활동을 자신이 직접 지도해보겠다는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주민멘토단에 의해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빌 게이츠 같은 IT계 리더가 나오고 동네 빈집을 활용한 창작공간에서는 부산의 미래 스티브 잡스가 3D 프린터와 씨름하고 있다. 2년 전 우리 동네 주민이 직접 결정하여 추진한 단독주택과 아파트 지붕에 대한 색채 및 건축계획이 주변 경관과 너무나 잘 어울려 대한민국 최고의 아름다운 지붕 상을 받았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 모두가 깨어 있는 주민들의 참여형 동네공화국 활동으로 기초부터 다시 세워지는 민주적 분권국가, 우리가 꿈꾸는 5년 뒤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부산복지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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