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하나. 버스가 부산 일본영사관 앞을 지난다. 그 전부터 이미 나의 목은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버스가 신호대기로 잠시 멈춘 사이 창밖으로 소녀상의 뒷모습이 보인다. "야야 저 쫌 바라. 저기 그건 갑네. 소녀상" 뒤에 앉은 할매가 내 앞에 앉은 할매를 향해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앞의 할매는 한 번 쳐다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내는 매일 본다" 한다. 뒤의 할매는 "아이고야, 추블까바 사람들이 연방 머를 싸매주고 케쌓네" 하며 눈을 못 뗀다.
장면 둘, 일본강제동원역사관 전시실 한쪽, 일본군 위안부로 간 조선여성들의 사연이 애니메이션으로 상영되고 있다. 화면을 보고 앉아있는 두 할매의 굽은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관람객은 없고 전시실은 조용하다. 전시실을 한 바퀴 돌 동안 화면에서는 애니메이션과 함께 이제는 할머니가 된 그녀들의 육성도 들려온다. 두 할매는 이따금 서로의 귀에 대고 조용히 얘기를 한다. "얼라 아이가, 열네 살, 다섯 살, 우째 그 어린 것들을 델꼬 가서…." 혀를 차는 소리도 들린다. 영상이 끝나고 두 할매는 조용히 일어서서 나간다. 그 자리에 내가 앉는다.
장면 셋, 소녀상에 매일 찾아와서 합장을 하고 사과, 바나나 등의 과일을 손수건으로 살뜰하게 닦아서 올리는 할매가 있다. 주변 청소도 하고 사람들에게 얘기도 해주면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간다. 구봉산 너머로 짧은 겨울 해가 설핏 넘어갈 무렵 할매의 그림자는 소녀상의 그림자와 무척 닮아 있다.
일본영사관 앞이 부산의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여행객이든 부산사람이든 소녀상 옆의 빈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는다. 영사관을 지키는 젊은 의경들이 사진사가 되어줄 때도 종종 있다. 왜 여기에 소녀상이 있는지 묻는 아이들에게 젊은 어버이들은 성실하게 답을 한다. 소녀상에 반성의 내용을 담은 일본인의 편지도 놓인다. 한편 소녀상을 철거하라는 1인 시위도 열리고 어깃장을 부리는 황당한 글귀도 내걸린다. 어찌 되었건 그곳은 날마다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살아 있는 장소다.
부산은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한 징용과 징병, 위안부의 강제동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곳이다. 수많은 사람이 부산항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끌려갔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해방 이후 귀국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소녀상의 존재는 그런 부산항의 아픈 역사를 오늘에 잇대어 놓는다. 긴 뱃고동 소리를 따라 천천히 뱃머리를 돌리며 멀어지는 배 안에서 열대여섯 소녀들은 평생 빠져나오지 못할 가혹한 운명의 감옥을 예감이나 했을 것인가. 소녀상은 일본영사관뿐만 아니라 영도다리 밑 옛 부산항의 자리에도 세워져야 한다.
그런데 일본은 이제 소녀상의 존재만 부정할 뿐 아니라 이름마저 빼앗을 형국이다. 일본 외무성 간부는 주한일본대사관과 부산일본총영사관 앞의 소녀상의 명칭을 '위안부상'으로 바꾸려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소녀상이란 표현은 마치 순진한 소녀들이 위안부가 됐다는 의미로 해석된다는 일본 우익 세력의 주장을 근거로 말이다. 하지만 2015년 한일위안부 합의문에도 명백히 '소녀상'으로 표기되어 있다. 나라가 힘이 없어 꽃 같은 소녀들이 악마의 전쟁터로 끌려가는 것을 막지 못했는데 지금 또 정신 못 차리는 정부 때문에 치욕의 한일위안부 협상도 모자라 소녀상이란 이름조차 능욕을 당한다. 듣기에도 치가 떨리는 '위안부상'이라니.
정부는 또 어떤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는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관련하여 상황악화를 가져올 수 있는 언행을 자제하는 것이 한일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국민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는 권력, 국민의 편에 서지 않는 권력의 입에서나 나올 수 있는 소리다.
지난 4일, 토요일 오후 5시, 소녀상 앞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부산민예총 춤 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매주 토요일마다 진행될 '부산소녀상 지킴이 예술행동'의 첫날이다. 한바탕 풍물놀이로 터를 닦고 난 후 소녀상에 바치는 헌시가 이어지고 춤꾼들은 길 위에서 맨발로 아프게 춤을 추었다. 누군가 등 뒤에서 음향으로 깔리는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낮게 따라 부른다. 슬쩍 돌아보니 또 할매들이다. "춤이 참 슬프네…." "저 사람들은 영혼으로, 끌리간 아아들 영혼으로 춤을 춘다 아이가. 그라이 슬프지…."
부산영사관 앞, 거기, 소녀상이 있다.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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