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행복감으로 채운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자신감과 달리 자존감이란 뽑히지 않는 든든한 뿌리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깊은 신뢰와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늘 함께할 수 있다면 어떤 치명적인 악재와 만나더라도 덜 분노하고 자신을 잘 관리하여 벼랑 끝으로 곤두박질치는 일만은 막을 수 있다.

세상에 대한 저주와 원망이 그 누구보다 깊었을 것 같은 헬렌 켈러는 받은 것이 많아서 못 받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악재와 사이좋게 악수하면서도 주어진 생을 여유롭게 감당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국가가 나서서 교육과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에 공을 들여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국민이 높은 자존감을 가지려면 나라가 도와야 한다. 국가의 핵인 개인이 높은 자존감을 가질 수만 있다면 삶의 질 향상의 문제까지도 해결할 수 있게 될 테니까.

하버드대를 비롯한 여러 연구 자료에 나와 있는 자존감 수치를 측정하기 위한 질문들을 살펴보면 삶을 총체적으로 사유하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어떤 결정을 하겠으며 어떤 서운함을 느끼는가와 같은 분노 조절 능력에 대한 항목이 많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똑같은 질문에 대한 생각과 행동은 나이를 먹으면서 달라져 간다. 아스라한 세월 저편의 내 모습도 지금의 내 눈에는 아주 낯설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빈핍한 현실에 대한 불만과 열패감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단 하나의 결점이라 할 수 있는, 그 시절이 얼마나 빛나는 시기인지에 대해 무지했다.

꽤 많은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정작 책 속의 내용과 내 삶이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시절의 내 이웃들이 그랬지만 수십 년 동안 단벌로 버티면서 차비를 아끼느라 걸어서 출근하는 아버지, 그 때문에 새벽부터 남편과 아이들의 도시락을 싸야했고 아이들 옷이며 간식을 손수 만드느라 단내 나는 일상에 짓눌린 어머니를 보는 것이 불안했다.

고등학교 삼 년 동안 한 켤레의 신발로 버티느라 기운 신을 신어야 했던 현실도, 초등학교 동창회마저 경찰에 신고해야 했던 독재 하의 모든 일이 젊은 날의 역동성과는 거리가 먼 무기력함으로 일상을 소모하게 하였다. 젊음이란 쉽게 분노하게도 되지만 그렇기에 무언가를 도모하기에 적당한 에너지 또한 충만하다. 하지만 나는 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 내내 생물학적으로는 분명히 살아있었으나 진정한 의미의 주인의식은 갖지 못했다. 그로부터 어언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바늘을 자주 든다. 물론 부모님이 육십 년 된 모시옷을 아직도 입는 이유는 할머니의 손길이 담긴 결혼 선물이라는 특별함 때문이다. 나 또한 옷이 없어서가 아니라 여전히 말짱하니 수십 년의 세월은 흘렀지만 고쳐서 입고 있다. 발에 특별히 잘 맞으니 기운 신을 신기도 하는데 간혹 의아해하며 뚫어지게 바라보는 학생들이 있다.

어떤 이는 왜 그러냐고 묻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무엇을 타고 다니며 어떤 가방을 들고 있으며 어디에 사는가가 그의 도덕성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렇지만 우리는 보이는 것에 매달려 어이없는 부끄러움까지 느낀다.

요즈음 우리들의 일상은 뉴스에 점령당해버렸다. 뉴스 속 인물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막대한 재산을 가졌으나 부도덕한 방법으로 갈취한 부모의 재력을 거저 받아서 누린 자식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움켜쥔 권력과 재화는 약자를 괴롭히는 데에만 사용되었을 뿐 정작 자신들은 마치 무뇌아처럼 돈과 권력의 노예로 살았음도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또한 지식과 학벌이란 것이 인성과 얼마나 무관한 것인지, 탐욕에 갇혀 몸과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다운 사람으로는 절대 살지 않았음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유롭게 살기란 어렵다. 나의 경우만 해도 수업으로 만났던 학생이 수만 명에 이르니 언행에 자유가 없다. 내 앞에 놓이는 수많은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만은 혹독했던 역경들로 인해 오히려 편안해졌다. 얼마 전 여든넷의 연세인 아버지는 탱고 발표회 자리를 가졌다.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탱고의 선율 너머로는 촌지를 받지 않았다고 교장에게 밉보여 먼 외지로 쫓겨난 젊은 날의 아버지가 보였다.

조실부모한 탓에 자신이 원했던 시간은 꿈도 꿀 수 없었던 가난한 가장의 모습이었다. 야수와 싸우고 나면 야수가 된다고들 말하지만 남다른 자존감 덕분에 역경의 늪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팍팍한 현실을 너그럽게 수용해온, 쓰라렸으나 결코 위축됨 없이 걸어온 기나긴 행로에는 어머니의 도시락과 그 덕에 당당했던 아버지의 세월이 무대 위로 흐르고 있었다. 지금의 나도 예전과 달리 치명적인 악재 속에도 행복이 숨어 있음을 안다. 이런 결 고운 시간의 원동력이 되는 남다른 자존감이야말로 부모로부터 받은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소설가·동의대 기초교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