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대한민국 권력 심장부가 바꿔치기될 때마다 이른바 '시대정신'이라는 게 떠올랐다. 주권자인 국민의 염원이나 세상 흐름이 담겼든, 정치권력의 심리 조작술로 포장됐든 이는 '한 시대의 사회에 널리 퍼져 그 시대를 지배하거나 특징짓는 정신'이다. 역사학적으로 볼 때 '한 시대의 문화적 소산에 공통되는 인간의 정신적 태도나 양식 또는 이념'이라고 한다.
딱 부러지게 이것이 당대의 시대정신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역사가의 사관(史觀)이나 가치관에 따라 시대정신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역사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다시 써야 하겠지만, 어쨌든 그 시대 사람들의 보편적인 정신 자세나 태도를 드러낸다. 그 흐름에 역행하려는 자는 엄청난 소신과 용기가 있어야 했다.
기껏 70년을 겨우 넘은 한국 현대사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구호성 깃발이 난무한 시대정신이라는 게 변화무쌍하게 등장했다. 남북통일, 반공, 민주주의 실현, 산업화, 정의사회 구현, 민주화, 문민개혁, 지역갈등 해소, 역사 바로 세우기, 지방분권, 경제 회복, 국민 행복 등 적지 않은 가치관과 용어가 떠오른다. 지금에 와서 따져보면 그때의 시대정신이 그것이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재간이 없다. 추상적인 개념으로 포장된 감이 없지 않은 데다, 일부는 보이지 않은 세력의 음습한 의도가 잔뜩 묻어 있는 느낌마저 든다. 정말 당대의 가치와 정신을 제대로 담아냈느냐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이제 식상할 지경이다.
하지만 어쩌라. 권력 심장부가 곧 바꿔치기될 상황이니 또다시 시대정신을 거론해야 할 판이다. 어느 누가 영향력을 발휘할지 두고 볼 일이지만, 시대정신도 판 갈이할 시기가 도래했다. 이번에는 어떤 가치관과 용어가 떠올라 국민적 지지를 얻을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가치 창출에 필요한 시간이 그렇게 넉넉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일단은 권력집중 타파를 중심으로 한 헌법 개정이라는 가치 창출은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편이다. 그러나 콕 집어낼 가치 정신이 선명하게 불거지지 않는 분위기다.
현재 거론되는 대권주자 중 누가 권력 심장부로 진출하든 여소야대 정국을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러니 일부는 보수와 진보의 연정시대를 역설하고, 또 일부는 이를 두고 부패한 권력세력과의 야합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이 가치관은 당장 시대정신의 반열에 오를 것 같지는 않지만, 생명력을 얻을지 조금은 더 지켜봐야 하겠다. 누구는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매력적인 용어를 던졌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장시간 노동은 물론 주6일 근무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이 시대의 많은 사람에게는 아직 와 닿지 않는 개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회 전반에 퍼진 적폐를 일소하는 청소론이 유력 후보를 통해 등장했지만, 선뜻 이를 받아들이는 데 망설이는 세력이 많다. 언필칭 노동자 세상이나 경제 민주화, 보편적 복지, 국민통합, 국민주권, 통일시대, 신세계화 등과 같은 거창한 구호에는 공허감이 감돈다. 앞 세대에서 너무 자주 우려먹은 '초대형' 가치관인지라 눈길이 갈 리 없다. 한때 여권 진영의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라는 평가를 받았던 한 인사는 '정권교체'에 빗대 '정치교체'를 팔아먹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장사 밑천'이 달렸는지 중도에서 하차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지금은 시대정신의 실종시대인가. 어설픈 진단이다. 이제는 시대정신이 억지로 만들어지는 시대가 아니다. 권력의지가 충만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구호성 이슈에 흥분할 필요도 없다. 우리 시대에 당면한 특징적인 정신이야 얼마든지 있다. 슬프지만, 기대 수명이 길어진 시대에 노후 준비 시계까지 빨라진 현실에서 잘 노는 노년의 삶과 문화의 중요성이 새삼 부각된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에 육박하는 이 시대에 청년 취업률 높여야 하는 숙제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저출산 시대 어린이보다 노인이 많아지는 세상이 닥치고, 곧 맞닥뜨릴 '노인 지옥 시대'도 다급히 준비해야 할 과제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은 언제 오려나.
무엇보다 일한 만큼 벌고, 번 만큼 세금 내는 것이 당연시되는 우리만의 멋진 이데올로기가 전 사회적으로 뿌리내렸으면 좋겠다.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세상에서 세금이 정당하게 사용돼 절대다수의 사람이 풍요롭게 사는 사회를 꿈꾸는 것은 사치이고 망상일까.
그동안 권력 심장부 바꿔치기에 성공한 세력들과 학자들은 "이것이었다"는 식의 시대정신을 만들어내고, 이를 합리화하기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바람 빠진 풍선 꼴이 되기 일쑤였다. 이번에도 이 꼴을 봐야 할지 모를 일이다.
시대정신이라는 게 어차피 다시 쓰일 운명이라면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꿔치기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권력의지가 충만한 그들이 급하면 찾고, 또 지겹도록 찾고 있는 '우리 국민'이 아닌가.
편집국 부국장 겸 뉴미디어본부장 choonjin@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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