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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군중에서 나온 사람, 군중 속으로 들어간 사람 /권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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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7-03-06 18:59:12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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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주말이 오고, 펄럭이는 깃발에 엉겨 가맣게 밀려가는 TV 속 군중을 바라보며 내 친구 안드레이를 생각한다.

오래전 한·소 수교 직전이었던 1990년 오월, 민들레 흐드러진 모스크바의 콤소몰(공산청년동맹) 학교에서 그를 만났었다. 이르쿠츠크 지역 콤소몰 간부라던 그는 스물일곱의 나이에도 벌써 두 아이의 아버지라 하였다.

"이게 러시안 스타일이지." 일회용 가스라이터를 건네는 나에게 손을 내젓고는 투박하고 커다란 성냥을 꺼내 담뱃불을 붙이며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소비에트 체제가 무너지고 10년에 걸친 체제이행의 대재앙이 시작되던 무렵, 빨간 말보로 담배와 팬티스타킹이면 모스크바에서 못할 일이 없던 그 시절이었다. 그때 그곳에서 일회용 라이터라면 꽤 신기한 선물이었다. 안쓰러운 그의 자존심.

그가 속한 콤소몰이란 조직의 지난날 서슬을 생각할 때, 장차 정치가나 고위관료가 되려 하느냐는 내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니예트(아니)." 하지만 그는 단호히 부인하였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입으로만 지껄이고 있어. 아무도 무언가 정말 실천하려 들지는 않아. 고르바초프도 옐친도 다 마찬가지야."

하지만 70년의 사회구조와 사람들의 행동양식이 몇 년 만에 바뀌리라 기대하는 건 좀 조급한 생각이 아닐까.

"그렇지 않아. 우리는 참을 만큼 참아왔어. 모스크바 지하철 속에서 보았지? 잔뜩 찌푸린 그 얼굴들을."

오랜 시간이 흐르고서도 지하철 건너편 자리의 무표정한 얼굴들을 마주 볼 때면 안드레이가 떠오르곤 했다. 살짝 수줍음을 탔지만 엘리트다운 품격과 결연함으로 그는 말했었다. "그래서 나는 군중 속에서 실천하려 해. 그게 어떤 것이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영웅적 구호와 선동 같은 것들로는 그 무엇도 나아질 수 없어."

꼭 소식 전하라며 또박또박 주소를 적어주더니, 두 번이나 보낸 내 편지에 그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붕괴해버린 공산당, 한때 그 전위조직으로서 막강하던 콤소몰과 함께 그의 삶도 사위어갔을 것이란 생각에 마음이 짠했다. 아직 풋풋하던 시절, 외계의 행성처럼 모든 것이 경이롭던 모스크바여서 그랬던 건지, 고작 며칠을 스쳐 간 그가 마음에 오래 남아 있었다.

소련 붕괴 후에도 과거 지배세력은 최상층부의 한 꺼풀만 벗겨졌을 뿐 대부분 변함없는 영화를 누렸음을 알게 된 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의 일이었다. 나는 가끔 궁금했다. 안드레이, 그는 다짐대로 군중 속으로 들어가 세상의 진보를 위해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 아니면 체제이행의 혼란 속 거대한 국가재산을 빼돌려 나눠 먹는 파티에 끼여, 다른 선배들처럼 한몫을 톡톡히 챙겼을까.

3월의 그날이 가까워져 오며 촛불과 태극기로 갈라진 우리의 광장은 포악한 언어로 가득하다. 삼일절 태극기를 달아야 할지 망설이게 할 정도로 지독한 적개심. 동네에서 인사를 나누던 이웃 같은 저 사람들은 저 큰 분노를 어디에 탈 없이 담아두고 살아가는 걸까.

그 군중 앞 연단에는 분노를 부추기는 군상이 불을 지르고 있다. 다음 총선 당선에 모든 걸 걸어야만 하는 의원들, 그리고 이해관계가 그에 진배없는 기타 등등의 입장이야 또 그렇다 치자. 정치적 노선을 바꾸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나름의 생각이 있지 싶었던 사람조차 마이크를 잡더니 경악할 말들을 늘어놓는다.
정치가 아무리 현실적 계산과 냉정한 전략의 세계라 하더라도 이건 너무 남루하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삶을 살 권리가 있겠으나 그래도 너무 망가지지는 말자. 안 그래도 팍팍한 나날, 좋은 것은 오래가지 못하는 세상 이치가 새삼 서글퍼진다.

그래도 한때는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보리라 척박한 음지에 몸을 던졌던 사람을 여기까지 이르게 한 건 무엇일까. 험한 길의 좌절이 마음 한구석에 잠복해 있던 탐심의 봉인을 열었고, 어느 쪽이 합당한 출구인지 판단하지 못하는 군중의 눈먼 상처와 분노는 메피스토펠레스처럼 그를 저 연단으로 유혹하지 않았을까.

안드레이, 그렇고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처지에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겸연쩍다. 하지만 오늘 문득 너를 떠올리고, 너만은 이르쿠츠크 한 모퉁이의 비좁은 아파트에서 그때의 다짐처럼 개결하게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 친구 안드레이, 군중 속으로 들어 가리라던 너는 지금 어느 거리에 서 있는가.

경성대 국제무역통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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