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이 이루어진 현 시기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의미심장한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보수주의의 위기다. '촛불'을 '종북'으로 매도하는 참으로 비상식적인 가짜 보수가 활개를 치면서 보수진영 전체가 점점 더 위기의 늪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작금의 상황을 보수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좌우 진영 간의 싸움에서 수세에 몰려 있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보수의 정체성 자체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정체절명의 상황이다. 기껏해야 체제 경쟁의 맞수가 못 되는 북한이나 욕하면서 정작 우리 체제의 취약한 부분들에 대해 성찰할 만한 정신적 깊이나 진정성을 결여한 허접한 보수여! 무턱대고 종북 딱지를 붙이는 고약한 습성과 고집불통의 늙은이 행세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정작 자신만의 콘텐츠를 갖지 못하고 빈 수레만 요란하게 몰고 다니는 소위 '아스팔트 보수'와 결별하여 나름의 보수주의적 가치를 갖춘 품격 있는 보수로 거듭나기 위해 인문학이라는 도구는 꽤 쓸모가 있다. 인문학은 본성 자체가 보수적이다.

개개 인문학자의 성향과는 별개로 인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다. 사람을 사람답게 함양하려는 학문이 인문학이라면 그것은 인간사회의 근본을 잃지 않으려는 보수주의의 가치와 잘 어울린다. 아무리 세상이 혼탁하더라도, 아무리 변화와 혁신이 절실하더라도, 결코 흔들려서는 아니 될 기본원칙이 있다. 진리, 믿음, 올바름, 자유, 조화, 아름다움, 또는 헌신과 사랑 등과 같은 근원적 가치들은 다양한 문명과 종교, 또는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인류 보편의 가치들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대혁명 이래 자리 잡아 온 좌우 이념 대결의 구도는 이러한 원칙을 수호하려는 측(우익)과 감히 이를 뛰어넘어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도발을 감행하는 측(좌익) 간의 가치 투쟁을 근대 정치의 근간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잘 아는 영어의 'right'라는 단어가 '올바른' '오른쪽' '권리'라는 뜻을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보수주의의 요체는 한마디로 올바름의 수호이다.

현재 보수주의의 위기는 올바름을 찾는 본연의 임무를 소홀히 한 데 있는 동시에 올바름 자체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근대 사회가 성립되었다는 것은 기존의 올바름이 정당성을 위협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유럽의 절대왕정이나 조선왕조에서는 신학적 질서나 성리학 체계가 올바름을 독점했지만, 이러한 시대는 이념적 무주공산의 시대, 즉 '근대(modern times)'로 대체되었다. 어원학적으로 볼 때, '모던'이라는 말은 '바로 지금'을 의미하는 라틴어 'modernus'라는 용어에서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옛 시절과 확연히 구별되는 변화된 현재를 의미했다.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근대'가 도래한 이래 보수주의는 인간 본연의 가치를 애써 지켜내려 했기에 시대에 뒤떨어진 수구 논리, 기득권 논리, 골방 지식인의 허세, 혹은 기회주의라는 모진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보수주의는 이처럼 올바름 자체의 위기에 대한 고뇌의 산물이었다. 무엇이 옳고 정당한지가 더는 분명하지 않다면, 우리는 통속적인 진리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의미를 되물으며 그 사이에서 더 나은, 더 인간적인 길을 모색해야 하지 않겠는가? 보수주의의 역사가 반시대적 저항과 기득권 논리, 도덕적 엄격함과 권위주의 사이에서 요동친 것은 보수주의의 과제가 만만치 않음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이 땅의 보수진영은 과연 어떠한 점에서 스스로가 '보수'인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시대에 저항하는 고뇌의 깊이도, 도덕적 엄격함도 보여주지 못하며 상대편을 비방하는 데서 존립의 근거를 찾고 있는 듯하다.

당면한 보수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해법을 인문학에서 찾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다. 인문학은 사실상 그 위기의 부분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근대 인문학은 보수주의가 씨름했던 바로 그 문제, 즉 인간 본연의 가치의 위기에서 비롯되었으며 어떻게든 확고한 가치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부심했다. 그것은 물론 혁신적인 사고를 하는 이들에게는 늘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역사가 랑케나 철학자 헤겔 같은 주류 인문학자들이 체제 수호에 주력한 데 반해, 콩트나 마르크스 같은 진보주의자들이 인문학의 기득권 논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회과학이라는 미답지를 개척한 일은 전혀 예외적 사례가 아니다. 그렇지만 인문학의 매력은 역설적으로 그 모호함과 추상성에 있다. 도대체 인간에게 있어 그 무엇이 확실하다는 말인가? 선명한 결론은 거짓이기 쉽다. 인간의 불확실성에 대한 깊이 있는 인문학적 사유가 우리에게 늘 새로운 영감의 원천을 제공해준다.

이 땅의 보수주의가 더는 고집불통의 늙은이가 아니라 혼돈의 세상을 밝히는 지혜로운 노인의 역할을 맡고자 한다면 늘 근본을 고뇌하는 인문학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