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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세상읽기] 가난을 곁에 두다 /김현수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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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7-03-21 19:43:39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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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거리 곳곳에 공사가 진행 중이다. 내가 출퇴근하는 중구에도 공사 표지판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그중 오르막길을 막은 '길 없음'이라는 표지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하단에는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런데 유심히 훑어보니 공사 기간 표시가 없었다. 언제 시작되고 끝나는지 알 수 없는 그 표지판은 꼭 지금의 어수선한 시국을 몸소 헤쳐 나가야 하는 시민들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는 듯했다.

많은 변화 속에서 올해는 더욱 새로운 다짐과 더 많은 인사를 했으나 때가 되면 자연스레 오리라는 봄은 좀처럼 쉽게 오지 않았다. 3월이 되었지만 시국의 풍파가 주는 여진은 끝나지 않았다.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업도, 상인도, 서민들도 모두 움츠러든 표정이다. 그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 매서운 추위 속에서 매화가 찾아오듯 모퉁이극장은 5주년을 맞았다.

얼마 전 관객문화활동가들과 함께 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는 길이 없어 막막하다 느끼는 요즈음 다시 우리에게 큰 의미를 준다. 이 영화에는 모퉁이극장이 처음 생겨날 때의 초심이 담겨 있다. 32살의 가난한 웨이트리스인 주인공 매기는 복서가 꿈이다. 그녀는 동전을 조금씩 모으고 모아서 생일날 자신을 위한 펀치볼을 산다. 펀치볼을 사기 위해 모은 꼬깃꼬깃한 지폐와 동전 뭉치를 꺼내놓곤 당황한 가게주인에게 씩 웃는다. 그 순간 매기의 표정에는 누구도 꺾을 수 없을 성실함의 빛이 머물러 있다. 정성을 기울인 시간만큼 드러나는 가치는 자신의 처지를 냉소하거나 주위를 탓하며 핑계를 대는 이들은 맛볼 수 없는 감동을 전해준다.

어느 날 코치 프랭크가 매기의 집을 찾을 때도 마찬가지다. 상대 선수의 전략분석을 위해 비디오테이프를 들고 왔지만 매기의 집에는 비디오 플레이어도 TV도 없다. 프랭크가 사람이 사는 집에 TV도 없냐고 핀잔을 주지만 시합이 잡혔다는 사실에 흥분하며 허공을 향해 잽을 날리는 매기의 모습에서는 기쁨에 찬 미소만이 가득했다.

5년 전 이 영화를 떠올리며 우리도 이렇게 살아가자고 말했다. 어려운 일이 많겠지만 매기처럼 주어진 일을 하루하루 건실하게 해나간다면 언제든 좋은 기회가 오고 우리들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라며 서로를 북돋웠다. 그녀와 같은 건실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알아보고 응원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 기억들을 다시 더듬으며 올해 모퉁이극장의 마음가짐을 '가난함'으로 정했다. 우리가 곁에 두려는 가난함은 매기에게서 배운 것으로 흠이 아닌 멋으로의 가난함이다. 그녀는 챔피언 쟁탈전에 나가기까지 돈을 벌었어도 생활을 크게 바꾸지 않았다. 그 모습은 자발적 가난함에 가깝다. 이 가난함은 떨쳐내야 할 것이 아니라 몸에 밴 것으로 자신의 꿈을 향해 부지런히 매진하는 생활에서 나온 철학이자 삶의 태도이다. 그렇다면 모퉁이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엘리베이터 없이 4층 계단을 오르내리고 낡은 상영관 의자에서 불편을 감수하며 보내는 시간 역시 관객문화운동에 동참하려는 수고와 노력이 아닐까 한다.

공약을 실천시키기 위해서는 5년이 걸린다고 한다. 5년 전 우리도 하려고 했던 일이 많았다. 거창한 계획들을 세워보기도 했지만 이렇듯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계획들이 전부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일구어낸 것이 있다.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문화를 만든 것이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장면들이지만 우리가 바랐던 단 하나의 풍경이다.
그런 풍경이 조금씩 쌓여 모퉁이극장에는 그동안 관객들에게 받아둔 '나만의 영화 톱텐' 목록이 6권이 되었고, 관객들이 영화에 대한 소감을 전한 관객토크의 녹취록이 가득 차 있다. 관객들이 정성껏 손글씨로 써준 톱텐 목록은 올해 영화제 프로그램으로 선보일 것이고, 녹취록에 담긴 생생한 목소리들은 관객문화운동의 성과로서 시민들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주어진 조건은 열악하지만 매기를 생각하니 우리가 할 일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듯하다. 길이 없다는 표지판을 볼 때마다 당황해서 나와 연결된 소중한 감각까지 잃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내게 있었지만 내 것이 아닌 것들을 돌려보낼 수 있는 가난함을 다시 생각한다. 그것은 눈앞에 닥친 과제들에 등을 돌리려는 것이 아니다. 가난함을 곁에 두고서야 명료해지고 단순해지는 것들을 우선 끌어안아 보자. 그러면 세상의 문제들을 풀어나갈 여유와 용기가 든든히 찾아들 것이다.

모퉁이극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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