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사이 부산에 내린 비가 길가의 벚나무 꽃망울에 내려앉아 봄을 알리는 향연을 시작한다. 뒷산엔 진달래가 그렇고 겨우내 숨었던 나뭇가지 새싹은 살며시 얼굴을 내밀어 밖의 공기를 살핀다. 자연의 생명이 기지개를 켜는 경이로운 장관은 이 순간 지금도 계속될 것이다.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주말엔 이웃과 어울려 이 놀라운 자연의 잔치를 놓치지 말아야겠다. 봄이 되면 지팡이를 짚고 힘겨워하면서도 즐겁게 아파트 꽃길을 걷던 분이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다. 다름 아닌 내 아내의 어머니이다. 지금은 그분이 옆에 없지만, 당신이 처음 부산에 올 땐 성한 몸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당신의 몸이 불편해지기 몇 해 전(2004년) 보건복지부 통계 자료로 내놓았던 '65세 이상 여자 노인 사망원인 1위인 뇌혈관 질환' 때문이었다.

좌측 뇌의 경색으로 움직임과 의사 표현이 쉽지 않았지만 딸의 집에 얹혀산다는 부담감에 힘들어했고 이를 지우기까지는 꽤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당신 나이 칠십 중반에 찾아온 뇌경색을 인정해야 하는 마음의 상처가 컸던 것 같다. 그렇게 상상할 수도, 가족력도 없던 일이 자신에게 벌어진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고 체력이 약해지면 온갖 질병이 몸을 자유롭게 놔두지 않는다는 것이 자신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당신도 가족도 모두 놀랐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환자를 돌보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짧은 시간에 이미 경험한 가족들은 긴장했고 예민해졌다. 쉽지 않은 일을 맡아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 느끼고 있었다. 자기 어머니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 일을 맡아준 이는 고맙게도 내 아내였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부산은 온화한 겨울, 아주 덥지 않은 여름으로 노인들이 생활하기엔 최적의 날씨였다. 그래서 딸 집이라는 부담도 부산 날씨의 명분으로 없앨 수 있었다.

좌측 뇌의 경색으로 음식물을 삼키기조차 쉽지 않았다. 노인 건강에 중요한 영양공급은 음식을 잘게 조리하고 하루에 여러 번 나누어 드렸다. 그래도 한 사람은 먹기 힘들어했고, 한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드리려다 가끔 충돌이 일어났다. 이럴 때 나는 살며시 자리를 뜬다. 뒤에서 "밥 안 드시면 죽어" "엄마 죽고 싶어?" 하지 말아야 할 약간의 협박 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를 7년간 하루에 한 번은 꼭 들은 것 같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빨리 죽겠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아내가 제일 힘들어했던 어머니의 식사 시간도 아내가 만든 24시간 프로그램에 따라 진행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사지로 몸을 부드럽게 이완시켰고, 워커(보행기)를 통하여 거실을 걷게 하였다. 비 내리는 날엔 워커와 고정식 자전거 그리고 하지 근력 강화 운동기구가 훌륭한 건강관리 도구가 되었다. 어눌했던 언어는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와 옆집 아이 유치원에서 쓰던 동화책을 읽는 것으로 회복을 도왔고, 자연스럽지 않던 오른손은 그림 그리기로 개선했다.

뇌졸중 환자에게 운동은 아주 중요하기에 비 오는 날이 아닌 경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파트 산책로를 걷는 것으로 대신했다. 좌뇌의 문제로 오른쪽 손발이 불편하여 걷는 것도 어려워 가끔 어린애처럼 싫어했다. 그래도 아내는 자기 어머니를 달래며 하루의 운동량은 반드시 실행했다. 아주 빠른 회복은 아니었지만 1년의 세월이 지날 무렵 봄 향기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던 어느 날 저녁, 아내는 어머니가 걸을 때 오른쪽 신발이 바닥에 끌리며 스치는 소리가 사라졌다고 아이처럼 좋아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살갗에 와 닿는 올해도 멀리서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 반가워하던 그분의 모습이 그립다.

인제대 스포츠헬스케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