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의 봄볕은 몹시 따사로웠다. 봄비 맞아 곧 이울까 싶던 벚꽃도 용케 큰 화는 면한 듯하다. 산들바람에 날리는 벚꽃과 멀리서 들리는 기계톱 소리 사이엔 풀 냄새와 새 소리가 섞인다.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의 첫머리처럼 바닥 모르게 어둡고 긴 겨울을 지나 눈부신 봄이 온 것이다. 찬란함도 머지않아 그만이라는 아쉬움이 어릴 적 봄맞이의 기억을 불렀다. 봄이 어찌나 싱숭생숭한지 좀이 쑤셔 한자리에 붙어있지 못하던 시절 말이다. 기계의 일개 부품처럼 산다는 생각은 이 계절에 대한 저주라 싶어 얼른 지워버린다. 저주에서 풀려나자 이국 타향이 갑자기 떠올랐고 가슴이 방망이질 친다.

이국의 이름은 알렉산드리아다. 산이 많은 마케도니아의 임금 알렉산더가 바다 건너 문명의 본고장에 세운 도시. 이집트, 페르시아를 차례로 정복하고 인도까지 원정하며 제국을 세운 알렉산더는 자기 이름을 붙인 도시를 남겼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도 그중 하나다. 옛 영화를 눈 씻고 찾아도 보기 어렵지만 고대 지중해 세계를 통틀어 최고의 도시 중 하나라는 그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이름이 알렉산더에게서 비롯했어도 그 도시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후계자들이다. 나일 삼각주의 하구에 건설한 해양도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가 되고 눈부시게 번영했다. '평원지대는 발전을 목표로 삼았지만 산악지대는 생존이 목표였다'. 페르낭 브로델의 문명 통찰은 산악지대 마케도니아 사람에게서 비롯한 이 도시의 운명이었다.

반듯한 계획도시에는 궁전과 즐비한 신전들 말고도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까마득한 높이의 파로스 등대도 있었다. 질서정연한 도시와 웅장한 건축물뿐 아니라 도서관, 천문대, 해부학 연구소, 동물원 등 우리 시대만의 것으로 생각하는 거의 모든 제도가 실현된 도시가 알렉산드리아다. 그 중심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창업자가 세운 '뮈세이온'이 있었다.

뮈세이온은 그리스 여신 뮤즈에서 유래한 대로 '뮤즈의 보물창고'를 가리킨다. 뮤즈는 학문과 예술을 둘 다 관장하기에 뮈세이온은 학예원이라 함이 옳겠다. 고대의 뮈세이온을 볼 수는 없지만 만약 상상해 본다면 …. 르네상스 시대 라파엘로가 바티칸 궁전에 그린 '아테네 학당'이 바로 아테네 뮈세이온의 상상화이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뮈세이온에는 무엇이 있나? 물론 화면에는 건물도 있지만 중심에 선 것은 수많은 문화 영웅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위시한 수많은 철학자가 바로 뮤즈의 보물이다. 학예의 진흥은 정책도, 그에 합당한 지원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인재가 학예 그 자체라는 것은 진리에 가깝다. 유클리드, 에우클레이데스, 에라토스테네스, 아르키메데스, 프톨레마이오스, 아리스타르코스, 칼리마코스 등 위대한 학자와 예술가들이 알렉산드리아 뮈세이온에 머무르며 연구했다.

뮈세이온의 자리는 근대에 박물관 또는 미술박물관인 미술관에 넘어갔다. 그 뿌리는 아테네보다 알렉산드리아에 있을 것이다. 그것을 잘 포착한 건축물이 하나 있다. 루브르 박물관 입구에 유리로 세운 피라미드가 바로 그것이다. 지나치게 현대적으로 보이는 바람에 계획 단계부터 소동이 났다. 중국 출신으로 세계적 건축가인 뻬이뤼밍의 설계는 루브르궁의 외관과 어울리지 않고 흉측하기까지 하다는 악평이 파다했다.

루브르 피라미드는 악평과 달리 소재와 형태가 서양 문명의 고금을 잇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걸작이다. 박물관의 뿌리가 유리 공업으로 유명했던 이집트의 그 도시에 있고 피라미드의 형태를 취한 것은 절묘하다. 유리 피라미드는 사실 파리가 새로운 알렉산드리아라는 선언인 셈이니까. 소동은 어쩌면 중국인 노건축가에 대한 편견이 도사린 탓인지도 모르지만 정작 지중해 문명사를 꿰뚫은 사람은 중국인이었다.

고도를 돌아보려는 뜻이 내게 생긴 것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때문이었다. 뮈세이온에 딸린 옛 도서관은 불타 없어진 지 오래고 지금은 동명의 새 도서관이 다시 섰다. 2002년에 개관한 새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외벽의 일부는 석판으로 치장했다. 전 세계의 문자 120여 가지를 새겼다니, 상상력은 유리 피라미드에 못 미쳐도 의미 있다. 한글 자모도 당연히 여기 포함되어 있는데 여름, 강, 세월 세 낱말이라고 한다.

낱말은 연이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띄엄띄엄 읽은 누군가는 이것을 '아름다운 세월'이라고 오독했다. 내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외벽 치장을 처음 안 것은 세월호의 비극이 빚어진 다음이다. 여름이 아닌 봄, 강이 아닌 바다의 세월에만 몰입한 탓인지 자꾸 도서관 외벽의 문자를 '아름다운 세월'이라고 말하는 버릇이 생기고 말았다. 기억의 장난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자꾸 이렇게 읽고 싶어진다. 봄도 바다도 세월도 아름다워지길 바라면서 말이다.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