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기록역사의 첫 페이지는 무엇인가? 우리들의 삶과 생활 모습을 담고, 후손들에게 자신이 쌓은 삶의 지식을 전수하는 기록의 첫 페이지는 무엇인지 아는가? 그리고 이 지식전달을 무엇으로 하였을까? 기록할 종이와 필기도구가 개발되지 않았을 때는 무엇으로 기록을 남겼는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역사책을 살펴보면 그 답은 하나로 귀결된다. 바로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거대한 바위에 음각과 양각기법으로 커다란 배를 타고 고래를 사냥하는 모습과 동물을 잡고 축제를 여는 선조들의 모습이 담겼다. 이는 우리가 글자를 배우기 전 그림일기를 그리고, 종이가 없을 때 땅에 그림을 그리는 바로 그 모습이다. 땅에 그림을 그리면 지워지기에 선사인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은 암각화를 그렸다. 마치 자신들은 사라져도 그 기록만은 남기기 위해.

이 기록은 우리 선조가 울산 앞바다에는 고래가 많다는 정보를 준다. 고래를 잡기 위해 바닥이 둥근 배를 만들어야 하고, 10여 명이 협력해야 하고, 강한 작살을 사용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교과서처럼 알려주고 있다. 놀랍게도 이 고래선을 만들던 기술은 수천 년이 흐른 현재, 울산에 그대로 전수되어 세계 제 1의 조선소 현대중공업이 만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울산의 조선산업은 수천, 수만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래를 잡던 모습도 1970년대 말까지도 그대로 남아 울산 장생포에는 포경활동이 활발했으며, 고래마을도 조성됐다. 지금은 울산의 고래관광특구산업이 되었다. 반구대 암각화는 마치 수천 년을 내다보고, 현재 우리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듯한 동영상이다.

단단한 바위 위에 300여 점의 그림 기록은 무엇으로 그렸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바위에 생생한 고래와 동물들의 모습을 세밀하게 조각한 도구는 무엇일까? 당시에는 단단한 금속 소재의 공구들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재질인 돌을 사용했을 것이다.

반구대 암석은 그 경도가 약한 이암과 셰일로 구성돼 있다. 공학적으로 재료를 단단함을 나타내는 지표는 경도이다. 이 중 모스경도가 가장 간단한 측정법인데 자연상의 가장 강한 금강석(다이아몬드)이 모스경도 10이고 활석이 가장 약한 모스경도 1이다. 반구대 암석의 경도는 모스경도 약 2.5 정도라고 알려졌으며, 이는 전체적으로 약한 재질에 해당된다. 따라서 반구대 암각화를 조각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강한 암석인 화강암, 석영(모스경도 6~7)을 날카롭게 만들어 조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구석기인들은 더욱 세밀한 작업을 위해 아주 얇게 쪼개지는 흑요석(모스경도 5~5.5)을 이용하기도 했다. 국립대구박물관의 '대구 월성동 유적 흑요석 원산지 및 쓴 자국 분석' 보고에 따르면 2006년 대구에서 출토된 1만8000년 전 구석기시대의 새기개 등 350점의 흑요석 공구, 도구들의 산지가 백두산 흑요석으로 확인됐다. 백두산 흑요석이 영남지역에서 그 존재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반구대가 지리적으로 대구와 가까워 충분히 흑요석 공구가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 최고 정밀도와 경도를 가지고는 초정밀 텅스텐 초경공구를 제조하는 대구텍(옛 대한중석)이 대구에 있다는 것도 놀랍다.

선사시대를 구분할 때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라는 용어를 쓴다. 당시 이들 재료로 생활용품, 공구를 유용하게 하고, 강한 무기를 만들 수 있다면 그 시대의 지배자다. 현대의 반도체시대에는 초고순도 반도체 실리콘(규소)을 잘 만들고, 이를 정밀하게 가공할 수 있는 초정밀 공구기술만이 있는 국가가 최고의 IT 국가가 된다. 우리나라가 이러한 재료 기술과 공구, 가공기술을 가지고 있다. 수천 년 전 반구대 암각화에 우리 생활을 정밀하게 새겨놓은 선조들의 뛰어난 가공 기술의 DNA가 그대로 전수되었기 때문이다.

재료공학자의 관점에서 반구대 암각화는 단단한 바위에 우리 생활상을 아주 오랫동안 변치 않게 새겨놓은 가공기술과 이를 조각한 공구기술을 공학적으로 부각시킨다면 그 역사적 가치는 배가 될 것이다. 암각화 하부는 안타깝게도 울산 사연댐에 의해 1년 내내 잠겨 있다. 하부 지역을 정밀 조사하여 수천 년 전의 최첨단의 초정밀 암각화 조각공구가 빨리 발견되었으면 한다. 수천 년 전 최첨단 가공공학기술이 적용된 암각화를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포경문화의 기록과 연계하여 이른 시일 내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길 손꼽아 기다린다.

울산대 교수·첨단소재공학부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