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조용하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대선 때만 되면 신문 한 귀퉁이를 장식하는 사건이 최근 어김없이 벌어졌다. 초등학교 동창 2명이 술자리에서 대선 이야기를 하다 말다툼이 벌어져 몸싸움 끝에 한 명이 중태에 빠졌다. 지지 후보가 다른 두 사람이 분을 못 이겨 결국 폭행으로 이어졌다는 게 경찰 설명이다. 비록 폭행 사태로까지 커지지는 않지만 요즘 웬만한 모임이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번 사건 또한 이런 사소한 언쟁에서 비롯됐을 테다.

언쟁의 전말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처음엔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이러저러해 좋다고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다 상대가 지지하는 후보의 단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비화되면서 언쟁은 격화됐을 법하다. 그 과정에서 최근 상대 후보에게 제기된 온갖 의혹이 근거로 제시됐음은 물론이다. 자신이 보기엔 도대체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는 후보를 상대가 막무가내 옹호하고 있으니 싸움으로 번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른바 '대통령 자격론'이다.

나름 이런 짐작을 해 보는 건 이번 조기 대선이 가지는 의미 때문이다. 대통령이 탄핵되고 수감되는 초유의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로서는 대통령의 자격을 뼈저리게 느끼고 새삼 그 덕목을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 무엇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사유만큼은 새 대통령이 이어받아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다. 그러니 과거 어느 때보다 이번 대선에서 대통령 자격론이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이런 민심을 반영한 때문인지 이번 대선에서는 유달리 대통령 자격론이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상대 후보를 겨냥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비난이 선거 운동의 대부분일 정도다. 문재인 후보는 주적과 북한 인권결의안 논란에 따른 불안한 안보관 때문에 자격이 없다는 집중포화를 받고 있다. 안철수 후보는 상왕론에 가족 문제 등으로 자격론에 휩싸였다. 홍준표 후보는 특유의 막말에다 '돼지 흥분제' 파문까지 겹쳐 뭇매를 맞고 있다.

선거 초반 쟁점이 됐다 사그라든 의혹들은 빼더라도 이쯤 되면 주요 후보는 한마디로 대통령 자격 미달자들이다. 자격 미달자가 상대 후보를 두고 대통령 자격이 없다며 물고 물리는 진흙탕 비난전만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의 결정판이다. 저마다 자신이 내세우는 기준이 대통령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주장하니 유권자는 헷갈릴 수밖에 없다. 폭행으로까지 번진 초등학교 동창 사건 역시 이런 정치판 '내로남불'의 연장이다.

사실 선거판에서 네거티브와 '내로남불'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치 선진국이라는 미국의 지난 대선 역시 네거티브와 '대통령 자격론'으로 시끄러웠다. 검증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상대의 약점을 이슈화하는 전략으로 네거티브만큼 효과적인 게 없다. 짧은 선거 기간 사실이든 아니든 일단 내질러놓고 보자는 유혹을 이기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검증과 네거티브의 경계도 애매하다. 실제 이번 우리 대선 과정에서 제기된 여러 의혹을 모두 네거티브로 몰아갈 수도 없다.

하지만 아무리 네거티브의 일부 불가피성을 인정한다 해도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국정 농단과 탄핵 사태로 과거 어느 때보다 대통령의 자격에 관심이 높아진 것은 바람직하지만 밑도 끝도 없는 엉뚱한 자격 논쟁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 때문이다. 탄핵을 이끌어낸 촛불 민심이 요구하는 새 대통령의 자격은 이런 게 아니었다. 동서고금의 지성들이 수없이 언급한 여러 가지 지도자의 덕목을 모두 갖추라고까지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새로운 지도자상을 제시해 달라는 것이었다.

가족 문제나 막말 등 도덕성과 안보관은 모두 대선 후보 검증에 필요한 대목들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하나하나가 대통령 자격의 절대적인 요소일 수는 없다. 안보관을 빌미로 해묵은 색깔론을 덧씌워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일도양단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애매한 가족 문제나 젊은 시절 '돼지 흥분제' 이야기까지 들먹인다고 그 후보의 도덕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모두가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 눈의 티만 보는 '내로남불' 탓이다.

불행히도 이번 대선에서 이 같은 네거티브가 수그러들기는커녕 더 기승을 부릴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 온 판국에 한 번 밀리면 끝장이라며 막장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초등학교 동창들 간의 막장 사건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이런 이전투구 끝에 누가 당선되든 반대편에서는 자격도 없는 대통령을 두고 임기 내내 흠집내기에 골몰할 것은 자명하다. 유례 없는 탄핵 사태에서 우리가 배운 거라곤 없는 셈이다. 아니, 단 하나 배운 게 있다면 자격도 없이 당선된 대통령을 언제든 탄핵할 수 있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이번 대선의 '내로남불'식 대통령 자격론 폐해가 더욱 무섭게 다가오는 이유다.

논설위원 jj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