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여린 꽃눈으로부터 왔다. 단단하게 굳은 가지 어디쯤에 여린 꽃눈은 숨어있다 고개를 내미는지 도대체 모를 일이다. 매일 다니는 길에 제일 먼저 매화나무 두 그루가 꽃눈을 틔웠다. 꽃이 피고 보니 백매(白梅)다. 하얀 솜뭉치를 나무에 얹어놓은 듯 졸망한 꽃망울들이 와글와글, 나를 불러 세우길 여러 번이었다. 그다음이 영주 시장 못미쳐 점(占)집 앞의 고무통에 자리를 잡은 앵두꽃이다. 가는 줄기에 종종종 하얀 꽃들이 달렸는데 내 눈엔 빨간 앵두가 송송 열린 듯 보인다. 나도 모르게 손이 갈 때가 있다. 앵두와 거의 동시에 핀 놈으론 그 점집 대각선 맞은편 길가에 붉은 꽃이 있어 홍매(紅梅)인가 싶었는데 어쩌다 우연히 알게 됐는데 만겹풀또기나무란다. 축대 옆 자투리땅에 제법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꽃핀 걸 보니 복숭아나무다. 아마 개복숭일 게다. 이제 봄꽃은 끝인가 하는 순간 벚꽃나무에 구름처럼 진분홍 겹벚꽃이 사태가 났다. 오래된 나무, 수양벚나무처럼 가지는 늘어지고 꽃송이는 아기주먹만해서 그 아래를 지나다 고개를 들면 꽃 멀미가 나는 듯 아찔했다. 며칠 전 밤 소나기 후두두 내리고 난 뒤 길가에 바람결 따라 소복소복 꽃잎이 쌓여있다.

장미대선이란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흔히 말해왔지만 정작 대통령선거라는 공식적인 행위를 수식하는 자리에 장미꽃이 덥석 차고앉으니 왠지 마음도 함께 들썩인다. 물론 지금의 선거가 전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이라는 부끄럽고 참담한 현실에서 기인한 비정상적인 상황이긴 하다. 그러나 좌절하거나 한탄하고 있는 대신에 거리로 광장으로 몰려나와 매번 기록을 경신하면서 아름답고 장엄한 촛불의 길을 걸어온 시민들이 피운 꽃이다. 촛불의 꽃이 장미로 피어났다. 특히 이번 대선에 젊은이들의 관심이 높은 것 같아 무엇보다 대견하다. 물론 여전히 거기서 거기라고, 누가 되면 뭐 특별히 달라지냐, 하루하루 벌어 먹고살기 바쁜데 그런데 신경 쓸 틈이 어디 있냐, 하는 사람들도 보게 된다. 그러나 예전에 비해 후보자 방송토론을 일삼아 챙겨보고 정책공약을 꼼꼼히 살펴보는 이가 많아졌다. 이전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지레 포기하고 좌절한 채 정치혐오와 무관심에 빠져있던 많은 사람이 세월호와 촛불의 시간을 지나면서 소통과 참여로 서로 화답하고 있다. 어떤 후보의 부산 서면 유세장에서 마주친 젊은 세대들은 열정과 호기심으로 정치를 즐기고 40, 50대는 지난 시절의 뜨거운 기억을 호출하며 식은 가슴을 데우고 있었다. 5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올해 초 인턴으로 멕시코 몬테레이에 간 아들이 지난 3월에 전화를 했다. 투표하고 싶은데 멕시코시티까지 가야 한단다. 몬테레이에서 멕시코시티까지 959㎞, 버스로 10시간 비행기로 2시간. 집 근처에 투표소가 있는 국내 유권자에 비해 재외 교포나 국외 부재자들은 한 표를 행사함에 엄청난 적극성이 요구된다. 비용도 발생한다. 아직 수입이 제대로 없는 녀석의 국외 부재자투표권을 위해 비행기 티켓 값을 부쳤다. 세상의 모든 일은 자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인식됨은 어김없는 사실인 모양이다. 아들의 한 표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나라 밖 유권자들의 행로가 보인다. 지난 25일부터 시작된 국외 선거는 저번 대선에 비해 열기가 훨씬 뜨겁다. 지난 18대 선거보다 7만 명이 늘어난 29만4633명이 등록을 해서 역대 최다 인원, 116개국 175공관, 204개 재외국민 투표소에서 치러진다. 티베트의 한 스님은 1박2일 동안 버스와 삼륜차, 비행기를 이용해서 2000㎞ 떨어진 투표소에 가서 투표를 하고 다시 1박2일 그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한 표의 무게다. 멕시코시티까지 혼자 가는 줄 알았던 아들이 함께 갈 길동무가 생겼다고 한다. 마침 옆 사무실에 있는 동갑내기도 투표 등록을 했더란다.

봄이 깊어간다. 그러나 찬란한 봄 앞에 채 피지도 못하고 툭툭 떨어지는 가여운 청춘들의 절망도 깊어간다. '지옥고'라던가, 반지하 방 옥탑방 고시원이라는 주거환경,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오면 축하 대신 주어지는 학자금융자 빚, 반복되는 취업 실패, 끝내 더는 버틸 수 없어 스스로 생의 저편을 선택하는 청춘들까지…. 그들을 생각하면 이 봄이 눈물겹다. 천지간에 온통 꽃인 이 봄, 세상의 모든 청춘은 꽃보다 수만 배 아름답다. 그이들의 톡톡 터지는 봄날을 위해, 희망이란 말의 푸른 생명을 위해, 나는 오늘도 장미의 나날, 대통령선거를 기다리고 있다.

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