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저서 '상상력사전' 중에 이런 제목의 글이 있다. '미래는 배우의 것이다'. 연기 잘하는 배우 같은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내용이다. 1980년 미국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의 당선은 그런 세상이 도래함을 보여준 결정적 사건이었다고 베르베르는 표현했다. 후보자의 고명한 사상이나 통치능력보다 카메라 앞에서 멋진 연기를 하는 게 더 중요한 세상이 됐다는 뜻이다. 유권자들은 공약이 결국엔 공약(空約)이 되고 정책도 그대로 실현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재치 있는 언변 따위로 후보자를 선택한다고 베르베르는 꼬집었다.

주요 대선후보들의 TV토론을 지켜보면서 베르베르의 글이 생각났다. 이는 선거에서 TV토론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걸 말해준다. 더욱이 이번 대선은 선거운동기간이 짧다 보니, 한정된 TV토론에서의 후보 인상과 말솜씨, 논리 등이 주요 변수로 여겨진다. 현재 20%대로 추산되는 부동층 가운데 절반 가량이 TV토론 등을 보고 지지후보를 결정하겠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되짚어 보면, 지난 1~3차 TV토론은 주제와 상관없는 이전투구식 공방, 저급한 정치공세 탓에 유권자들의 불만이 컸다. 다행히 4차부터는 토론다운 토론이 되면서 비교적 나아졌다. 특히 토론이 거듭될수록 일자리와 고용안정, 경제성장과 분배, 외교안보와 북한 핵, 복지 문제 등의 분야별로 후보 간 노선 및 정책적 차별성도 뚜렷해졌다. 충분하진 않지만 후보를 고를 수 있는 정도의 윤곽은 드러난 셈이다.

그러나 5차례 TV토론에서 지방 살리기와 지역 간 격차 문제 같은 주요 사안들이 다뤄지지 않은 건 매우 유감이다. 시대정신인 지방분권·자치, 균형발전에 대한 후보들의 철학과 실행방안, 집권 후 로드맵을 듣고 싶었지만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오랜 중앙집권체제와 수도권 초집중화로 전국의 지방이 활력을 잃고 비수도권 주민들은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게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국내 면적의 11.8%인 수도권에 물적 인적 자원이 쏠려 있고, 비수도권과의 총경제력(1인당 지역총생산) 차이가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상황이 결코 정상적일 수는 없다. 수도권 또한 과밀화에 따른 교통·주택난과 환경오염, 범죄 문제 등이 심각하다. 이는 사회경제적 비용 증가와 국가 전체의 효율성 저하를 초래하고 있다. 이처럼 중차대한 사안을 대선후보 토론에서 논하지 않으면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과거처럼 선거공약으로만 써먹고 유야무야할 것인가.

각 후보가 애초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통해 제시한 10대 공약을 봐도 실망스럽다. 일부 후보를 제외하고는 지방분권 관련 내용이 대부분 단순하거나 원론적 표명에 그쳤다. 후보들은 그러면서도 지방분권 공약을 잇따라 발표했다. 비수도권 주민들의 표를 의식한 듯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핵심공약에 넣지 않은 걸 보면,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지 않거나 선거 구색갖추기용이라는 의구심이 든다.

일각에서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을 대립적 혹은 '제로섬' 개념이 아니라 상생적, 동반성장 관계로 접근할 것을 주장한다. 균형발전을 위해 상호 공생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둘의 격차가 막대한 지경인데, 정책을 전국적으로 똑같이 펴는 건 지역 불균형과 수도권 빨대 현상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역대 정권에서 수도권 집중 억제와 균형발전을 명분으로 수많은 정책을 추진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대선후보들이 표방하는 여러 정책도 이런 요소를 감안하지 않고는 지방문제를 풀기 어렵다. 따라서 차기 정권은 지방분권 개헌을 반드시 실현하고, 그와 더불어 수도권에 몰린 자원을 지방으로 이전하는 강력한 분산정책을 병행해야 한다. 수도권 규제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일정기간 동안 '선 지방육성 정책'을 집중적으로 펼치는 게 필요하다. 그 중에서도 기업의 지방 이전을 촉진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지방대학 육성을 포함한 지방 교육여건의 획기적인 개선이 핵심적 요소라고 하겠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파면으로 이뤄진 이번 대선의 주요 키워드는 대개혁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 차별받지 않고 공평한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 이를 위해 시대에 뒤떨어진 중앙집권체제의 낡은 옷을 벗고 지역의 다양성을 살리는 자치분권국가로의 대전환을 이뤄야 하겠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를 이대로 둬서는 국민통합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지방문제의 근본적 해법이 없는 개혁은 공허하게만 들린다. 서울로 가지 않고도 지역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고 괜찮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지방이 자결자족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제 TV토론은 내일 저녁에 한 번 남았다. 마지막 6차 TV토론에서는 지방 주민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논의가 이뤄지길 바란다. 그리고 다음 대선에는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도 후보 간 토론의 장이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편집국 선임기자 겸 (사)걷고싶은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 ksyo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