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1987년, 그때 난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서울역 인근에 있었는데, 당시 대부분 고등학교가 그랬듯이 난 엄청 짧은 머리에 교복을 입고 밤늦도록 야간자율학습을 했다. 그리고, 그해 6월, 매일 저녁 교실 창문으로 눈물이 팽 돌게 하는 뭔가가 쏟아져 들어왔다. 최루가스였다. 그랬다. 난 이렇게 '87 체제'의 시작을 만났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고문으로 숨졌고 진실이 은폐되자 시위의 열기가 높아졌는데,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 직격으로 사망한다. 6월 10일부터는 집회의 규모가 커졌고, '넥타이 부대' 샐러리맨들이 서울역으로 합류하면서 전 국민의 외침이 됐다. 바로 6월항쟁이었다. 그리고, 1987년 6월 29일, 당시 민정당 노태우 대표는 6·29선언을 발표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이 전격적으로 이뤄진다. 일명 제6공화국 헌법인데, 우린 아직 이 '87년 체제'를 살고 있는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여기저기서 이제는 개헌을 통해 87체제를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듣고 있다. 그런데 난 또 하나의 87체제도 무너뜨려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바로 '한국경제의 87체제'이다. 지금 모습으로는 정치뿐 아니라 경제도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의 87체제를 단적으로 말하면 '수출 대기업(재벌) 만병통치' 모델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한국은 제대로 된 자원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원재료를 수입해 기가 막힌 제품을 만들고 수출로 돈을 벌어야 한다. 수출이 잘되면 외화를 벌고, 수출 기업들이 성장하면 고용을 창출하니 또 좋다. 이다음엔 내수가 호응한다. 고용이 잘되고 월급이 오르면 외식도 많이 하고 백화점에서 옷도 많이 살 테니까 결국 내수가 활황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살기 좋은 나라가 된다. 그래서 '경제의 87체제'에서는 수출 대기업이 왕이었고, 이들만을 위한 정책을 폈고, 국민 사이에선 "재벌이 살아야 한국이 산다"는 인식이 각인돼 왔던 것이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를 통해 우린 처음으로 87체제의 태생적 한계를 확인했다. 노무현 정권 때는 구조적 모순을 겪어냈고, 이명박 정권 때는 87체제가 유지될 수 없다는 걸 몸소 체험했다. 우리의 재벌은 더는 1980, 90년대 재벌이 아니다. 가장 큰 문제로 '고용'을 꼽을 수 있다. 재벌 대기업은 온갖 지원과 혜택을 다 받고 수출 전선에 나가 떼돈을 벌었지만 내수를 외면한 채 고용을 늘리지 않았다. '수출-고용-내수'의 고리가 끊어졌고, 87체제의 선순환은 그대로 무너졌다. 낙수효과? 부질없는 헛된 희망일 뿐이었다.
정치의 87체제 대안이 많은 것처럼 경제 쪽에서도 87체제 다음의 '경제모델'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나온다. 첫째는 익숙한 경제민주화 모델이다. 잠시 성장을 멈추더라도 분배기능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먼저 상법 세법 공정거래법 등을 다 뜯어고쳐 그간 많은 혜택을 받은 재벌들의 곳간을 풀자는 거다.
둘째는 대만식 강소기업 모델이다. 우린 어쨌든 수출로 시작해야 한다. 다만 수출에 있어 재벌 대기업 위주에서 강한 중소기업 위주로 시스템 자체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 경제부총리도 이젠 기획재정부 장관이 아니라 중소기업청장과 겸직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셋째는 조금 극단적인데, 한국경제를 벤처창업과 서비스업만으로 양분하는 모델이다. 외화는 사물인터넷과 바이오 테크, AI(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의 벤처 스타가 벌어오고, 내적으론 소매업, 음식업, 숙박업, 여가, 관광 관련 서비스업 등에 정책자금을 올인해 고용을 최대한 끌어올리자는 취지다. 나아가 문화산업이나 의료, 관광 등으로 특화해 외국인과 외자를 유치해 내수 성장동력을 키울 수도 있다.
난 정치도, 그리고 경제도 모두 87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쪽이다. 그런데 정치든, 경제에서든 이런 개혁을 완성하려면 기존 정치판의, 그리고 경제계 쪽 기득권 세력이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대전제가 필요하다. 문득 1987년 6월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최루가스에 짜증만 냈던 나. 하지만 이번엔 열정과 희생으로 대변혁에 함께할 생각이다. 넥타이를 맨 채 퇴근길 서울역에 나가 87체제를 이끌어냈던 선배님들, 이젠 내가 그중 한 명이 될 차례인 것 같다.
경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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