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나이를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진짜 연령대가 궁금한 이유도 있겠지만 대개는 서열을 정하기 위함이다. 외국인들이 좀처럼 이해 못 하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문화이기도 하다. 이럴 때 젊은 세대들은 "민증(주민등록증) 한번 깝시다"라는 속어를 많이 쓴다. 이 과정에서 실제 나이와 호적상 나이가 차이가 나는 사람은 심심찮게 다툼에 휘말리는 수도 있다.

주민등록증에 실린 등록번호는 관련 법에 따라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모든 국민에게 부여된다. 역사는 의외로 짧다. 1968년 11일 21일 주민등록증이 발급되면서 시작됐다. 탄생 배경도 예사롭지 않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이나 불순분자가 들끓자 선량한 국민과 이들을 구별하기 위해 주민등록증 사용이 법으로 규정됐다. 당시 주민등록증 발급 때 뒷자리 숫자가 가장 빠른 남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100001'이었다. 우리나라 국민 가운데 제1호로 주민등록증을 받았다는 말이다.

주민등록번호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개인의 신분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반면 한편에서는 인권 침해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13개의 숫자만 보면 당사자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개인의 생년 월일과 출생지, 성별 등을 고스란히 알 수 있어서다. 그래서 주민등록증 반대론자들은 당장 폐지는 할 수 없더라도 다른 나라처럼 무작위 번호를 부여해 개인신상이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정부가 그동안 법원 판결을 토대로 제한적으로 이뤄졌던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허용하기로 했다.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돼 생명·신체·재산·성폭력 등의 피해가 걱정되는 이를 도와주려는 목적이다. 변경 절차도 간단하다. 개인정보 유출 확인서 같은 증빙자료와 신청서를 주민등록지에 기재된 읍·면·동 주민센터에 내면 된다.

우려되는 바는 주민등록번호 변경이 가져올 부작용이다. 범법자가 범죄 경력을 은폐하거나 일반인이 법령상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번호를 바꾸려는 시도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어서다. 물론 행정자치부의 주민등록번호 변경위원회가 옥석을 가려낼 터지만 행여 처리 과정에 구멍이라도 생기면 사회가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정부는 이번을 계기로 주민등록번호의 생성 방법이나 주민등록증 대체 수단 마련 등에 대해서도 한번 깊은 고민을 해보는 것이 어떨지.

염창현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