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드라마는 심리극이라고도 불리는 즉흥극의 형식으로, 정신건강의학과 환자에게 일정한 대본이 없이 어떤 역할과 상황을 주어서 그가 마음 내키는 대로 연기를 하게 하여 평소에 억압된 감정과 갈등을 드러내게 한다. 이렇게 해서 환자의 심리적인 문제를 치료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환자 자신이 상대방 역할을 맡고, 상대가 자신을 대신 하는 식으로 역할을 맞바꾸는 '역할 전환'의 기법이 흔히 쓰인다. 이때에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보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으며 자신도 남의 심리를 파악하거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이다.

현대 사회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아마도 '속도감의 범람'이라고 할까? 현대는 이렇게 우리를 바쁘게 재촉하고 매 순간 도저히 알 수도 없는 엄청난 양의 정보를 토해 놓는데, 그 속에서 타인을 배려하고 섬세하게 이해하며 생활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병원은 아픈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라서 환자를 보는 의사에게는 이런 '역지사지'나 '역할 전환'의 자세와 공감능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어느 드라마에 나왔던 '아프냐? 나도 아프다'란 말이 의사의 자세에 잘 들어맞는 말이라고 믿는다.

얼마 전에 큰맘 먹고 건강검진을 받기로 했다. 고백하기에 솔직히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평생을 소화기내과 의사로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대장내시경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다행히 핑계를 댈 수 있었던 건 우리 집안에 대장암의 내력이 없다는 이유 한 가지였다. 그러나 평소에 술도 마시고, 요즘 들어 저녁 식사로 고기를 자주 먹는 게 늘 맘에 걸리던 터였다. 환자들에게는 집안 내력이 없어도 나이 오십이 넘으면 반드시 대장검사를 받으라고 얘기해왔던 자신에 대한 문책이기도 했다.

건강검진에는 수많은 종류의 혈액검사가 있지만 이것들은 피 한 번 뽑는 것으로 끝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추가로 선택하는 내시경검사는 번거롭다. 특히 대장내시경검사는 많은 양의 물을 약과 섞어서 마시는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설명서대로 시간을 맞추어 마시기 시작했는데, 부담스러울 정도의 많은 양이었다. 잠을 설쳐가면서 힘들게 물을 마시면서 21세기 의료혁명의 시대에 대장내시경을 위한 설사약도 간편하게 만들어 놓지 못하고 무슨 큰 병을 고친다는 건지 나 자신을 포함한 의사들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다음 날부터 내 진료실에 들어오는 환자에게는 이 모든 준비과정에 대해서 아주 자세한 설명과 나름의 요령을 충분히 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건강검진을 받던 날은, 제법 큰 용종이 하나 발견되기 전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필자의 대장에서 용종이 발견되자 우리 병원의 대장전문 의사는 재빠르게 용종을 잘라내고 치료가 잘 마무리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생겼다. 시술이 끝나고 설명서를 받았더니 거기에는 며칠간 술을 마시지 말고 당일은 운전도 삼가라는 등의 여러 가지 주의사항이 들어 있었다. '내가 의사인데, 이렇게까지…'하는 생각에 그냥 무시해버렸다. 그날 저녁 모임에서 술을 마셨고, 음주는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그런데 용종을 뗀 지 나흘째 되던 날 새벽에 갑자기 많은 양의 피를 쏟고 놀라서 응급실로 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또 한 번의 준비과정을 거쳐 시술을 받고 나서 다행히 출혈은 멈추었지만 의사에서 환자로 입장이 바뀌어 검사와 치료를 받는 힘든 과정을 제대로 경험하게 되었다.

아픈 사람들을 보는 것이 일상이며 일반인들보다 몸에 대해서 더 잘 알기 때문에 실제로 내 몸에 대해서는 더 소홀해지기 쉬운 직업이 의사일 것이다. 환자들의 입장에서 함께 공감하고 아파하면서 정작 나의 아픔에 대해서는 무뎌진, 그래서 내가 아플 때 환자들의 아픔을 더욱 잘 헤아리게 되는, 그래서 '의사는 더 아프다'.

해운대백병원 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