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다발(事故多發)의 에너지를 얻고자 '심심찮은 문학기행'이라는 이름으로 작년 9월부터 2~3개월에 한 번씩 1박2일 일정으로 벗들과 함께 시인을 만나고 문학관 탐방도 했다. 김용택, 곽재구, 이원규, 박남준 시인과 소설가 김승옥 씨를 만났고, 이병주·조정래·박재삼 문학관을 다녀왔다.
어느 날, 외화번역가 이미도 씨가 시를 한 편 보여준 적이 있는데 처음 써본 시란다. "2016년 12월 9일에 첫 시 '와온'을 탈고한 이후로 90여 일간 대략 40편의 시를 지었습니다. 그 가운데 30편을 가려내 첫 시집 '아름다운 것은 관심받길 원치 않아요'에 담으려고 합니다"라는 계획도 들려주었다. 김용택, 곽재구 시인을 만나고 받은 영감 같은 게 불을 질렀을 것이다. 문학기행의 기회가 없었다면 시를 쓸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으니까.
10여 년 전, 교감으로 근무하던 학교의 기숙사를 담쟁이로 뒤덮고 싶어 아이들과 식목일에 담쟁이를 심었고 정성껏 키웠다. 그런데 사건이 벌어졌다. 6월의 어느 월요일 아침, 여느 때와 같이 기숙사에 들렀는데 가슴 높이였던 담쟁이 60여 포기가 줄기는 물론 밑둥치까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아예 담쟁이의 흔적을 지워버린 엄청난 사건, 일주일이 넘게 범인 색출에 나섰건만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행정실에 새로 부임해 온 김 주사가 토요일에 담쟁이를 잡풀인 줄 알고 깨끗이 걷어냈다'는 기막힌 소식이 날아들었다. 교감실로 불렀다. 정말 담쟁이를 몰랐고 미안한 마음 감당이 안 되니 차라리 벌을 달라고 하였다.
"김 주사! 이번 주 안으로 도종환의 시 '담쟁이'를 100번 쓰세요!" 내 목소리는 떨렸다. 하나 어떻게 하겠는가. 이틀 뒤, 학교 식당에서 김 주사와 마주쳤다. 스물여섯 번 썼는데 다 외웠단다.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그가 밥을 먹다 말고 시를 줄줄 외운다. 그날로 나는 담쟁이 사건을 종결할 수밖에 없었다. 뿌리는 살아 있으니 내년 봄을 기다리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면서.
그 후 김 주사가 내게 한마디 던진다.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은 더 좋던데요." 시에 재미를 붙였다는 말이다. "교감 선생님! 시집을 한 권 사려고 하는데 어떤 게 좋겠습니까?" "'정현종 시전집 1'을 한번 사보세요." 네루다의 시집을 번역한 정현종에게 관심이 많을 때였다.
나는 교장으로 발령이 났다. 축하한다며 김 주사가 학교에 찾아와 하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교장 선생님! '정현종 시전집 1'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 하나를 적어 봤습니다." 정성스레 적어온 것은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로 시작하는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이었다. 나는 김 주사에게 신경림의 산문집 '시인을 찾아서'를 보냈다. 우리 시의 역사에서 고전이 된 시들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쓴 신경림의 기행문이라 시를 좀 더 가까이하게 해 줄 것 같아서였다. 아마 지금쯤 김 주사는 시인이 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담쟁이 사건으로 시 '담쟁이'를 외우고 정현종과 신경림의 시를 감동적으로 체험하였기에 어쩌면 시가 그를 찾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시인으로서의 탁월한 잠재력을 가졌다고 모두 시인이 되는 건 아니다. 개개인의 감성이랄까, 시적 잠재력은 그에 적합한 경험을 가질 때 비로소 눈뜨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시만이 아니다.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가능성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은 그 해답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직 그 해답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직접 몸으로 살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올 초부터 우리 영재교육진흥원에서는 매주 월요일 아침 모임 시간에 시 필사(筆寫)를 시작했다. 세 번째 되던 날, 우리 연구원 한 분이 시를 쓰고 싶다고 하였다. 평소 시와 교감이 없었지만 시 필사를 통해 '그렇게' 시가 불현듯 와 닿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행복하게도 나는 김 주사, 이미도, 그리고 우리 연구원이 시를 쓰면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적을 만드는 데 작은 역할을 한 셈이 되었다.
"오빠, 엄마 집에 핀 백년초(선인장) 꽃이 지려고 하는데 어짜꼬요?"라는 급한 전화를 했던 고향의 누이, 또 한 사람의 시인을 탄생시키고 싶은 마음이 울렁거린다.
부산시영재교육 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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