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패배 후 미국으로 떠난 홍준표 전 경남지사는 LA 공항 도착 직후 그곳의 취재진에게 짧은 말을 남겼다. "선거 떨어진 놈 뭐 취재할 게 있다고…"라며 "둘째 아들네 보러 왔다"고 말을 아꼈다. 패장은 말이 없는 법이라 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평소 거침없는 입담을 뽐내온 그의 스타일을 감안하면 아무리 패장이라도 다소 의외로 여겨졌다.

그래선지 당분간은 조용하려나 했더니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페이스북 정치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한껏 드러내고 있어서다. 지난 14일 페이스북에 "귀국하면 신보수주의 이념을 중심으로 당을 새롭게 하겠다"고 포문을 열었다. 귀국 후 당권 도전 가능성을 시사한 것. 16일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구보수주의 잔재들이 당을 틀어쥐고 있는 한 국민은 한국당을 버릴 수밖에 없다"며 차기 당권을 노리는 친박계를 정면으로 겨냥했다.

여기까진 그나마 점잖았다. 하지만 17일 특유의 노골적인 거친 말로 친박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였다. "박근혜 팔아 국회의원 하다가, 박근혜 탄핵 때는 바퀴벌레처럼 숨어 있었고, 박근혜 감옥 간 뒤 슬글슬금 기어 나와 당권이나 차지해보려고 설치기 시작하는 자들"이라고 친박에 맹공을 퍼부은 것이다.

표현이 거칠긴 해도 말인즉슨 그다지 틀리지는 않다. 졸지에 바퀴벌레 신세가 된 친박들로선 황당하겠지만 전력을 보면 수긍이 가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홍 전 지사가 과연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대선 막판 당무우선권을 발동, 바른정당 탈당파 복당과 친박 핵심 3인방 징계 해제를 전격 단행했다. 그러면서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동단결해야 한다. 천하대의를 따르는 큰 정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바른정당 탈당파는 물론 친박계까지 끌어안는 보수 대통합을 역설한 것이다.

그랬던 홍 전 지사가 이제 와 친박을 구보수의 잔재로 비난하며 다시 갈라치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아무리 대권도 좋고, 당권도 좋다지만 아쉬울 땐 대통합을 외치고 걸리적거리면 바퀴벌레로 모는 게 그가 강조하는 신보수주의인지 아리송할 뿐이다. 홍 전 지사는 출국길에 "세상이 나를 다시 부를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진정 세상이 불러주길 기대한다면 "미국 가서 공부도 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본인부터 세탁기에 돌리고 돌아와야 한다"는 전여옥 전 의원의 말부터 깊이 새겨야 할 듯하다.

장재건 논설위원 jj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