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혁명이 불러온 전직 대통령 탄핵과 구속, 그리고 뒤이은 대통령 보궐선거가 끝났다. 마치 신세계를 보는 듯 취임하자마자 보여준 새 대통령의 행보에 국민의 관심과 애정이 깊다.

진영논리를 떠나 우리는 그동안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권력기관과 국민 사이의 소통이, 아직은 새 정권이 막 시작한 즈음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적 패러다임의 변화 가능성을 여러 번 겪었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반민주적인 권력 남용 및 부패에 저항해 분연히 저항했던 4·19 시민혁명과, 1979년 부마항쟁 및 이듬해 '서울의 봄' 등이 그렇다. 시계를 돌리면 동학농민혁명과 3·1 운동처럼 왕조권력과 일제에 대한 전 국민적인 저항운동까지 셈할 수 있다. 이번 새 정부의 출범은, 지금까지 한국 시민들이 보여준 민주를 향한 물결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이정표다.

그런데 더욱 바람직하고 희망찬 나라를 만들기 위해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하다. 필자는 '0시'의 비유로써 전환점에 접어든 이 나라의 풍경을 조망하고 싶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가운데 명작이지만 비교적 덜 알려진 작품 '0시를 향하여'가 있다. 악랄하면서도 치밀하게 범죄를 모의하는 범인의 마수에 걸려든 한 여자, 그리고 모든 것이 범인의 계략에 맞춰 완전 범죄가 성립되려는 찰나 절망에 빠졌던 여자에게 '우연의 손길'이 뻗쳐 사건의 전모가 해결되는 이야기다. 필연과 우연이 겹치고 상충하면서 결말로 치닫는, 작가 특유의 추리 장치가 돋보이는 이 작품의 제목에 'zero'가 붙어 있다. 점점 무거운 발걸음으로 파국의 끝을 향해 걸어가서 닿는 지점이지만 그간의 모든 일이 어떻게 꿰맞춰 왔고 어떤 연유로 그래왔는지 그 비밀이 열리는 시점. 괘종시계의 추가 정확히 0시를 가리켰을 때 마수의 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의 얼굴이 나타나는 의미로 읽었다.

지난 몇 년간 나라 곳곳에서 벌어진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작태와 추문들을 생각할 때 과연 진실과 정의는 이미 죽고야 말았던 것인지 많은 이가 의문을 품었으리라. 적폐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묵인하고 승인해온 '관습'이란 이름으로 관대하게 용인되지는 않았는가. 혹은 버젓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던 위법과 반사회적 언행들을 스테레오 타입화되고 체화된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스스로 체념의 늪 속에 빠져들어 가지는 않았는가.

수많은 시민이 촛불을 들었던 광경이 쉽사리 장담할 수만은 없는 사회정치적 변혁을 위한 필연적인 형상이었다 해도, 새 정부가 향후 과제를 풀기 위해 행하는 여러 시도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 건설을 위한 충분조건은 될 수가 없을 것이다.

합리적인 설계와 판단으로 펼치는 정책에 대한 결과는 수학처럼 투명하고 명백한 과정을 거치는 논증으로 반드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필연의 세계는 '우연'이라는 회오리바람에 자신의 몸을 노출하고서야 더욱 명료해진다. '변수'는 '상수'를 해치기보다 옹호하면서 접근하는 관대한 우연일 뿐이다. 그러나 애초의 뜻과 의지에 맞게 일이 착착 순조롭게 진행되더라도 사회 곳곳에서 예기치 않은 상황들이 언제라도 얼굴을 내밀 태세를 갖추고 있다.

낡은 개념이 되어버린 반공 이데올로기와 레드 컴플렉스는 지금의 중년층 이상의 다수 국민에게 무의식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이와 함께 쉽게 말로는 꺼내지 못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지닌다. 표면화되지 않고 물밑에서 오랫동안 유유히 흐르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가 바라고 새 정부가 이룩하려는 진정한 국가 정체성은 늘 유보될 수밖에는 도리가 없을 것이다.

전직 대통령 탄핵과 새 정부의 출범을 맞은 2017년의 봄은 바야흐로 이 나라의 '0'시가 아니었겠는가. 지난 정권의 국정농단 실체에 대한 전모는 아주 우연한 실마리로부터 발원했다. 곳곳에 숨어있었지만, 그 뒤 급물살을 타게 된 농단의 구체적인 면모들이 국민이 두 눈 부릅뜨고 바라보는 무대 위에서 깨춤을 추었던 것이다. 상식에 반하고 조금의 민주 의식을 지닌 국민이라면 쉽게 상상하기 힘든 사실들이 천하에 드러났다. 비밀과 은폐의 눈동자는 아직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힘겹게 오수를 떠받쳐 올라온 청정한 물결이 새로운 역사의 물줄기에 합류한 지금 이때가 제대로 된 길로 방향을 단단히 잡아야 할 역사적·정치적 시작점이다.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 '0시를 향하여'는 희대의 살인마이자 사이코패스인 '네빌'이 순수하고 차분한 성격의 전 부인 '오드리'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나, 극적인 순간에 등장한 '앤드류'의 기발하고 우연한 착상으로 오드리가 함정에서 벗어나게 되는 해피엔딩의 추리물이다. 앤드류는 '기적'을 믿었던 사람이다. 기적이 곧 필연으로 바뀌게 되는 시각이 바로 '0시'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