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세상에서 가능한 한 피하면 좋을 상황이 바로 선악의 대결이다. 절대 악이 판을 칠 때 우리는 최소한의 법도와 순리를 지켜내기 위해 선의 편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이는 실로 숨 막히는 상황이다. 악의 편에 설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선의 세력이 내세우는 흑백 논리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소위 회색의 시각은 기회주의라는 오명에 짓눌리게 된다. 그러나 어쩌랴. 일단은 힘을 보태어 절대 악을 물리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겠는가.

국민의 힘으로 이루어진 정권교체는 이와 같은 숨 막히는 대결상황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짐을 의미한다. 부정을 일삼던 절대 권력이 무너짐으로써 이제는 회색의 입장들도 고개를 쳐들고 저마다의 특색 있는 진단과 전망을 펼쳐볼 수 있는 호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여러 가지 사안 중에서 특히 국정교과서 강행으로 빚어진 역사교육 논란도 이제는 좀 더 수준 있고 세심한 논의로 변화시킬 여지가 생겼다. 사실 국가가 역사의 해석을 틀어쥐고 자기 입맛에 맞는 방향으로 국민을 몰아가겠다는 발상이야말로 참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었다. 더구나 그 방향이 친일과 독재라는 거악을 옹호하는 것이었으니 국정교과서의 폐기는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부터 시작된다. 나쁜 역사가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올바른 역사인가? 과연 누가 그 올바름을 판단할 것인가?

회의주의 내지는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보자면, '올바른' 역사를 논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 실로 단 하나만의 '올바른' 역사라는 발상은 근대적 '역사' 개념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래 동양의 '사(史)' 개념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사례들을 의미했지만, 이는 근대에 들어서면서 서양식 '역사(History)'로 대체되었다. 영구불변하다고 믿어지던 신학적, 자연법적 진리가 무너진 자리에 등장한 '역사'의 이념은 늘 변화하는 본성을 갖는다.

예컨대 우리가 일제강점기의 역사로부터 배울 것은 다시는 나라를 잃지 말자는 피상적인 교훈보다는 한 왕조의 멸망을 낳은 원인과 결과,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경험들이다. 단순한 도덕적 교훈보다는 인간 세상의 통제할 수 없는 우연성과 비극적 모순에 눈뜨게 하는 것이야말로 역사 공부의 묘미다.

물론 이러한 시각에 대한 반론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역사는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여야 한다.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된 역사는 늘 음험한 의도를 지니므로 있는 그대로의 과거를 아는 것만이 가장 올바른 길이다. 일견 그럴듯한 논리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역반론이 가능하다. 사실(fact)은 결코 진실(truth)을 보증해주지 않으며 오히려 많은 경우 진실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독일인들이 민족문화의 산실로서 꼽는 자랑스러운 도시로 중동부에 위치한 바이마르가 있다. 이른바 '일름 강(江)의 아테네'라는 별칭을 지닌 이 유서 깊은 소도시는 대문호 괴테의 자취가 가득한 고전주의 문학의 성지일 뿐만 아니라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바이마르 공화국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도시를 찾은 여행객은 누구나 괴테와 실러가 손을 맞잡고 서 있는 유명한 동상 앞에서 찬란한 고전문화의 숨결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인근 산에는 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가 있다. 부헨발트 수용소는 극악한 나치 치하에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장소로, 동독 치하에서는 반파시즘 투쟁의 선봉에 섰던 공산주의 순교자들의 성지로 탈바꿈되었으며 현재는 나치와 공산주의 체제 모두를 반성하는 장소로 재활용되고 있다. 대체 어느 쪽이 이 도시의 진실인가?

상호모순적인 사실들 앞에서 우리는 올바른 역사를 포기하기 쉽다. 그러나 이럴 경우 과연 어떻게 일본 정부에 역사적 진실을 요구할 수 있는가? 어떻게 독재의 부역자들에게 감히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진실은 결코 하나일 수 없지만 상대화해서는 곤란하다. 행복은 다양한 척도를 갖지만 고통만큼은 환원 불가능하다. 바로 얼마 전까지 논란거리이던 국정 역사교과서는 대한민국의 유례없는 성공에 대해 자긍심을 키워주는 단일한 역사를 표방했는데, 나라 발전에 별 도움이 안 되었을 주변인들, 예컨대 불복종 시민세력, 사회적 낙오자, 온갖 부류의 소수자, 인권피해자 등은 자화자찬적인 성공담 속에 파묻혀 버렸다.

올바른 역사는 이와는 반대 방향을 취해야 옳다. 행운과 불운 사이에서 삶을 일구어갔던 사람들의 모습은 결코 일방적인 논리에 편입될 수 없는 회색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인간의 취약한 본성과 불확정적인 생애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인간 세상의 이치에 한 걸음 더 다가선다. 역사적 진실은 함부로 독차지하거나 쉽사리 포기하기에는 너무나도 본질적이다.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