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거주춤한 걸음에 찡그린 얼굴로 진료실을 찾은 한국 소년은 미국 유학생이라 했다. 항문 염증으로 미국에서 수술했으나 낫지 않아 고국행을 결심했단다. 한 번 수술비가 2000만 원이 넘어, 세 번 수술하고 나니 7000만 원이 들었는데 병은 낫지 않고 고생만 거듭하다 나를 찾아왔다 한다. 당일 응급수술 후, 금세 편해지자 환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급한 불을 끄고 미국으로 돌아가 학기를 마치고 일정을 잡아 근본수술을 했다. 6개월간 3회에 걸쳐 한 달여간 특실에서 입원 치료한 우리 병원의 청구비는 약 500만 원.
미국, 일본, 유럽 등지에서 항문 수술을 하기 위해 병원을 찾는 동포가 늘고 있다. 진료비가 싼 때문에 여행경비를 제하고도 돈이 남아 고국에서 친척들도 만나고 맘 편히 치료도 한다. 중국이나 러시아의 한국 의료관광 붐은 오래되었다. 세계적 수준의 의료기술에도 진료비가 싸고 서비스 수준이 높아 대접을 받으면서 양질의 진료를 받을 수 있어 선호한다. 한국의 진료비는 미국의 10분의 1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고, 호주나 일본의 3분의 1 정도 수준이다. 그러니 부자들은 '싼 게 비지떡'이라며 미국이나 일본으로 향하기도 할 것이다.

대한민국 현대 의학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의료수준은 세계적으로 손색이 없다. 우리 의사들의 지식과 수술기술이 탁월하여 치료성적도 수준급이다. 40년 역사의 의료보험제도는 세계인들이 부러워한다. 그러나 군사정권 시절, 사회복지 실시가 필요했던 시기에 의료보험제도를 강행하면서 의료수가의 과도한 절하를 단행한 바 있다. 궁극적으로 전 국민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게 된 것은 잘된 일이나 당시 절하된 의료수가로는 의료 서비스의 질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대학병원이 구조적으로 수익성 추구에 몰두하게 되면서 본연의 교육연구 역할 수행에 큰 부담을 안게 된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오랫동안 의사는 '동네북'이었다. 의사들의 잘못도 있겠거니와 수가 보장이 되지 않으니 본연에 충실하지 못한 의사가 늘어났고 이에 따른 편견에서 오는 오해는 크게 쌓여 있다.

의료 현장에서는 의료재료비에 비하여 진료, 처치, 수술비 등 의료행위의 수가가 OECD 평균에 비해 턱없이 낮다고 끊임없이 호소했다. 의료기관의 유지관리에 필요한 비용이 의료행위에 녹아들어 있으나 원가에 미치지 못한다. 이를 만회하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환자를 봐야 하는 외과계의 리스크는 커져 있고, 경영을 위하여 비급여 항목을 만들어내야 하니 국민의 의료비 본인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는 '지역 간 의료서비스격차 줄이고 의료양극화 해소' '의료영리화 막고, 의료공공성 강화하겠다'고 한다. 우리 국민의 소득대비 건강보험료율, 건강보험보장률, GDP 대비 공공의료비, 국민 의료비 지출 등 대부분의 복지 관련 지표가 OECD 평균 대비 낮은 편이다. 이러한 지표는 한 나라의 복지 수준의 잣대가 된다. 건강보험공단에는 20조 원이 넘는 적립금이 있다. 이 적립금을 활용하면 우리의 의료 관련 지표를 OECD 평균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확신한다.

새 정부는 관련된 빅데이터를 이용해서 모든 지표를 면밀히 분석해 주었으면 한다. 국민의료 보장성 강화를 전제로 적정부담 및 적정수가를 산출해야 한다. 이러한 결과물은 의료질서의 개선에 꼭 필요하다. 정확하게 계산된 지표를 근거로 한 사회적 조정절차에는 반대 정파나 단체의 입김이 사그라질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의료 양극화는 자연적으로 해소될 것이고 의료의 공공성 강화 등 대통령의 공약을 받쳐줄 구체적인 방안이 하나둘씩 나타나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외부에 가성비 높은 의료인으로 알려져 영광스러우나 딱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한편으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다. 피나는 노력으로 이룬 우리 의료기술이 '비지떡' 취급받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부산항운병원 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