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업을 둘러싼 산업생태계는 매우 복잡 다양하다. 구심점은 선박을 운항하는 해운사지만, 그를 둘러싼 비즈니스는 화물운송, 선박 관리, 해운 중개, 선박금융·보험, 선급, 선박 수리, 벙커링 등 그야말로 셀 수 없을 정도다. 선박금융만 하더라도 그 안에는 다시 금융회사, 선박투자회사, 캐피탈사, 자산운용사, 회계·법무법인 등 수많은 참여자가 있다. 해운업 역시 조선업 못지않은 일자리 산업이 분명하다.
지난 4월 부산국제금융센터에서 둥지를 튼 한국선박해양㈜은 한국 해운업의 첫 번째 토종 토니지뱅크(Tonnage Bank·Provider)여서 적지 않은 관심을 모았다. 선박금융인의 한 사람으로서 줄곧 우리 선박금융 생태계에 토니지뱅크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온 입장이어서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980년대 이전 한국 해운업에 대한 선박 공급은 주로 일본 종합상사가 시세차익을 위해 시장에 매각하는 10년 내외 선령의 중고선박이 주를 이뤘다. 1990년대 이후 우리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해운사는 한국전력, 가스공사 등 공기업 대형 화주와의 장기 화물수송계약을 위해 선박을 새로 짓기도 했지만, 장기 거액의 선박금융이 필요한 자사선보다는 그리스를 비롯해 유럽 등 해외 선주로부터 배를 빌려다 쓰는 용선의 비중을 때로는 더 크게 운용했던 게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해외에서 빌린 선박에게 지급되는 용선료가 해당 선박을 운용해 벌어들이는 운임을 크게 상회하여 해운사 재무경영에 큰 적자 요인(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이 되기도 했지만, 해외로부터의 용선은 예나 지금이나 국내 해운사 선박 확보의 중요한 채널이 되고 있다.
일본이나 그리스처럼 오랜 역사와 함께 굳건하게 자리 잡은 선주업(Ship Owning Business), 즉 선박을 빌려주는 영업은 제한적이긴 하지만 국내에도 존재했다. 그중 자산관리공사의 선박펀드는 리먼사태 이후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해운사로부터 중고선박을 매입한 후 다시 빌려주는 S&LB(Sale and Lease back) 거래를 통해 토니지 공급은 물론 자국 선대의 해외 유출을 막는 기능을 수행했다. 지금까지 이 기능은 지속되고 있다. 다만 자산관리공사 펀드의 경우 중고선박의 S&LB 거래를 주로 하는 등 본격적인 선주업과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
왜 토니지뱅크는 특별할까. 그리스나 일본 선주처럼 선박을 빌려주는 것일 뿐인데 무엇이 그렇게 다를까.
해운기업의 입장에서는 화물운송을 위한 선박 확보 측면에서만 보면 직접 배를 짓거나 매입한 자사선이나 외부로부터 빌려온 용선이나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선박을 빌려주는 선주와 금전을 빌려 주는 은행은 입장 차이가 크다. 예를 들어 불경기에 해운사가 어려움에 봉착하면 통상 자율협약에 의한 구조조정이나 법정관리에 의한 회생계획 등의 법적 조치로 인해 금전을 빌려준 금융회사는 담보권 행사 등을 통한 원금 회수가 자유롭지 못하지만, 선박을 빌려준 선주의 경우 법적 조치와 무관하게 선박을 회수하고 이를 다른 해운사에게 빌려줌으로써 영업 활동을 계속할 수 있다.
이 같은 이유로 토니지뱅크는 해운사 신용도에 민감한 은행보다는 폭넓게 거래할 수 있고, 특히 해운·조선 불경기에도 일본이나 그리스 선주처럼 싼 가격에 선박을 구매 또는 신조하여 선대를 확충하고 선박을 빌려주는 역경기 선박 투자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동안 우리 해운사는 경기가 후퇴하는 경우 선박을 짓고 싶어도 금융이 어려워 곤란할 뿐 아니라 당장 급한 선박 확보를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비싼 용선료를 지불하더라도 외국 선주로부터 선박을 빌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한국선박해양과 같은 토종 토니지뱅크의 등장으로 불경기에도 선박 발주와 유리한 조건으로 선박을 용선할 수 있는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선박 수요자인 해운회사 입장에서 보면 선박 확보의 길이 다양해진 것은 사실이다.
설립 초기의 한국선박해양은 아직은 여러 방면에서 사업 추진의 여력이 없겠지만, 앞으로 본격적인 사업 궤도에 오를 경우 그간 우리 선박금융 시장에서 보기 어려웠던 역경기 선박투자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선박해양이 지금보다 자본금과 전문 인력을 더 확충하고 한국 해운산업에 꼭 필요한 선박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신조선 발주 등 기존 은행 중심의 선박금융과는 확연히 다른 차별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정부와 해운업계는 해운·조선의 장기적인 상생 발전을 위해 해양금융 관련 기관의 통합과 해양선박금융공사 신설에 대한 논의를 진행 중이다. 공사 설립이 어떤 형태로 구현되더라도 선박금융의 활성화를 위해 어렵게 탄생한 토니지뱅크가 주축이 되어 경기 침체기에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역경기형 선박금융 생태계가 더욱 굳건히 자리 잡게 되기를 기대한다.
해양종합금융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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