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서나 혹한이나 잠들기 어려운 고통으로 다가오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체감도는 혹서가 더하다. 혹한은 가난한 사람도 옷을 껴입거나 이불을 덧덮으면 그럭저럭 견딜 수 있으나 혹서는 이길 방도가 묘연하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지난해 작고한 신영복 교수는 '여름 징역살이'라는 편지에서 그 괴로움을 이같이 토로했다.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감옥에 비길 수는 없지만 일반 사회에서도 여름은 인간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기 일쑤다. 온몸이 물 젖은 솜처럼 흐물거리고, 마취주사를 맞은 듯 정신이 몽롱해지는 열대야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얼마나 더운지/그는 속옷마저 벗어던졌다/엎드려 자고 있는 그의 엉덩이/두 개의 무덤이 하나의 잠을 덮고 있다'. 나희덕 시인이 쓴 시 '열대야'의 첫 연이다. 그는 무덤으로 변한 동침자의 엉덩이를 바라보며 불면의 밤을 보낸다. 시인에게 '밤은 열대처럼 환하다'.

최근 열대야 아닌 열대야가 이어지면서 시민들이 밤잠을 설치고 있다. 열대야는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전 9시까지 최저기온이 25도 이상 유지하는 것을 말하는데, 최저기온은 여기에 미치지 않지만 습도가 매우 높아 열대야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른바 '유사 열대야'다. 지난 1~8일 전국의 평균 습도는 89%를 기록했다. 과거 10년간 동일 기간의 평균 습도(80%)를 압도하는 수치다. 기온만 따지면 8, 9일 기준으로 열대야는 경남 양산, 강원도 강릉, 대구, 경북 울진·포항, 제주도 일부에만 발생했으나 높은 습도 탓에 부산을 비롯한 전국 다수 지역에서 열대야를 체감했다.

통상 열대야는 장마가 물러간 뒤 출현한다. 그러나 올해는 평년보다 장마가 늦게 시작돼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지난달 30일 첫 열대야가 발생해 조짐이 심상찮다. 2013년처럼 유례없는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건 아닌지 걱정도 든다. 그해 8월 강원도 강릉의 야간 최저기온이 30.9도를 찍어 국내 처음으로 초열대야(30도 이상 유지)가 펼쳐졌다. 열대야 기준 시간인 오전 9시를 10분 넘기긴 했지만 당시 경남 함양의 최저기온도 30.8도를 기록했다. 부디, 이 우려가 기우이기를! 비는 마음이 단비를 좇아간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