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니 블랙(penny black)'. 1840년 영국에서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우표다. 값은 1페니이고, 검은색 바탕 위에 빅토리아 여왕의 초상화가 인쇄돼 이런 이름을 얻었다. 빅토리아 여왕을 모델로 삼은 건 당대의 통치자인 데다 의회의 반대를 물리치고 '우표의 아버지'로 불리는 롤랜드 힐의 우편제도 개혁안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힐은 수신자에게 비싼 요금을 물려 우편물 수신 거부가 다반사로 일어났던 당시 우편제도의 폐단을 쇄신하기 위해 발신자가 요금을 부담하는 우표를 창안했다. 힐의 탁견을 알아보고 과감히 도입하는 지혜와 추진력을 지녔으니, 빅토리아 여왕이 첫 우표의 기념인물로 우편역사에 남는 건 당연하게 여겨진다.

우리나라에도 1884년 우표가 발행되기 시작한 뒤 통치자가 모델로 등장하는 건 흔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30종으로 가장 많고, 박정희 대통령(21종)과 이승만 전 대통령(6종)이 뒤를 이었다. 취임기념우표도 윤보선·문재인 대통령을 제외한 역대 대통령들의 것이 다 나와 있다. 그러나 탄생기념우표는 이 전 대통령뿐이다. 그는 1954년 '사사오입 개헌'으로 장기 독재 기반을 마련한 뒤 80·81회 생일에 연달아 우표를 발행했다. 두 종 모두에 임금이나 성인이 태어난 날을 일컫는 '탄신'이란 표현을 써 봉건왕조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2008년 들어선 탄생기념우표 발행대상이 일반 위인으로 확대됐다. 그해 윤봉길 의사와 지난해 화가 이중섭의 100주년에 이어 올해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항일투사를 양성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범, 이회영 선생의 150주년 탄생기념우표가 선보여 호응을 받았다. 앞서 2000년에는 독재권력 비판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시사만화 주인공 '고바우 영감'의 탄생 50주년 기념우표가 발행돼 눈길을 끌기도 했다. 과거를 조명하는 현재의 프리즘이 점차 다채로워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들이다.

하지만 그 작업은 늘 논란을 동반한다. 역사는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롭게 기록될 수밖에 없어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을 둘러싼 논란이 한 예다. 지난해 가결됐던 발행계획이 그제 취소되자, 진보 진영은 "독재자 우상화 피했다"며 환영하는 반면 보수 진영은 "국론 분열"이라며 반발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말이 하나 있다. "우표에서 배운 게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이다. 우리는 우표를 만들기도 전에 이미 많은 역사·사회적 학습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