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 가운데 가장 훌륭한 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몸에 익은 덕이라고 봅니다.” 신부님의 말씀에 연신 옳거니,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사랑이니 용기니 겸손이니 하는 덕목들은 늘 ‘당위’를 전제로 하고 있어서 입으로 내뱉기는 쉬워도, 언제나 자신과 ‘저만치’ 만큼의 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실천은 유예되고 단지 머릿속에만 맴도는 가치로 남을 뿐이다. 몸에 익은 덕은 말 그대로 몸에 밴 덕이라 의식적으로 덕을 행한다는 마음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그것을 실행할 수 있다. 당위가 주는 괜한 부담과 부채의식이 생길 리 만무한 것이다. 며칠 전 성당에서 배운 귀한 가르침이다.
사실 인류가 남긴 정신적인 가치의 대부분은 그 가치를 몸에 익혀 저절로 행하게 된 성인(聖人)이 존재했기에 지금에까지 유전되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리라. 그러한 정신적인 가치를 내용물이라고 치면, 내용물을 담는 그릇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주고받고 소통하는 형식의 측면에 견줄 수 있다. 인사를 나누며 고개를 숙이거나 손을 맞잡는 행위에서, 전자가 내용이고 후자가 형식인 격이다.
종교적인 의식이 철저히 몸에 밴 사제의 말씀이 나 같은 신자 축에도 끼지도 못한 걸음마 단계의 예비신자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면 아마도 그 말씀 속에는 억지로 부정한다고 해서 무효가 될 수 없는 원리원칙이 들어 있다. 이 원리원칙이 때로는 인간사회의 발전에서 성가신 장애물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것은 대부분 허례의 의식(儀式) 전통이 마치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로 둔갑해버려 사람들의 생활 전반을 멍에처럼 옭아맨 경우라 보면 된다.
헛된 치장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 시인이다. 시인은 허식을 멀리하며 기성관념이나 인습과는 생래적으로 맞지 않는 존재다. 시는 끝없이 거역하고 반항하는 길에서 울려 퍼지는 아우성이요 외침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은 사회나 국가공동체의 차원에서 보자면 불온하다. 저항함으로써 살아가는 자는 비록 시를 쓰지는 않더라도 시인이다. 그렇다고 기존 질서와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시인이라고 해서 ‘가짜’인 것은 아니다. ‘시적인 것’의 바탕에는 늘 의심과 비판의 혓바닥이 똬리를 틀고 있다.
세상의 총체적인 변화를 꿈꾸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아주 보잘것없고 허망할 뿐인 자기 둘레의 인습마저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고 거기에서 자기만족에 빠지면서도 정작 자신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거나 진보주의자라 자임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들에게 ‘덕’은 자신들이 익숙하게 말하고 행하는 패러다임 안에서만 실효를 거두는 가치다. 나쁜 의미의 ‘몸에 익은 덕’인 셈이다. 특히 시인에게 이러한 덕은 치명적이다. 시인이 시만 잘 쓰면 되지, 와 같은 말을 곧잘 하거나 듣게 된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시가 원래 불온한 장르고, 시인은 기존의 모든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들고 그것을 깨부수려는 망치와 같은 존재라고 우리가 인정한다면 다음처럼 말해야 한다. ‘시만 잘 쓴다고 시인은 아니다. 덕을 갖추어야 한다’. 이 덕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덕이다. ‘의심’이 덕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적어도 시인에게 의심은 시를 쓰는 강력한 무기요 수단이다. 의심하지 않고서는 의심할 여지도 없는 진실을 드러내기 힘들다.
강론을 마치고 걸어 나가는 사제의 뒷모습에 평신도들이 범접하기 힘든 권위가 물씬 풍겨져 나온다. 그는 20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교리와 예식 전통을 익힌 사람이다. 그의 말은 머리로만 가늠해서 나온 게 결코 아닐 것이다. 나름의 체득과 궁리가 들어있는 줄 안다. 수많은 성인이 걸어간 길을 좇고, 이에 따라 터득한 종교생활의 규준을 신자들에게 전수할 의무를 짊어진 사람이다. 말하자면 궁극의 뜻과 전통에 따라 자신을 성스러운 제단에 바친 존재다. 시인도 그러하다. 다만 사제와는 달리 시인에게는 ‘자유’가 주어진다. 세계를 과감하게 깨뜨릴 자유다. 이 자유는 흔히 기인이란 별칭을 얻었던 몇몇 시인이 보여주었던 그러한 자유가 아니다.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보편적인 사회적 덕목을 한두 가지씩 결여했고, 이러한 결여가 사람들로 하여금 오히려 ‘낭만적인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시인을 환상의 세계에 가둬버렸다. 이런 오해된 전통이 지금까지 여러 시인을 사로잡고 있다.
몸에 익은 덕은 환상이라는 이름의 인습적 멍에를 벗어던지고 현실을 사심과 편견 없이 바라보는 자리에서 생겨난다. 예술과 종교, 한없이 멀기만 한 두 영역은 실은 지척의 거리만큼 가깝고 오히려 서로 섞이면서 존재한다. 사제가 시인이 되기는 힘들지만 시인은 이미 사제다. 시인은 궁극적인 예술혼을 세상에 퍼뜨리는 책무를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인에게 가장 큰 덕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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