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잦아든 오후, 30도가 웃도는 집안은 찜질방이 따로 없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경보가 방안 깊숙이 들어와 앉은 지 오래다. 쉼 없이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은 시원하기는커녕 더위를 부채질한다. 부지불식간에 눈꺼풀이 감기고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에어컨 없이 버티자니 집안에서 일사병이 날 지경이다. 열어둔 앞문으로 이웃집 에어컨 외유기의 매콤한 냄새가 흘러들어오고, 산업도로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 소리까지 유난스럽다. 이제야 중복이니 쨍쨍한 더위와 더불어 지낼 날들을 어찌하랴.

폭염에 지친 여름이면 유난히 생각나는 장소가 있다. 바로 학교 근처나 동네 모퉁이에 자리했던 만화방이다. 당시 만화방은 협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벽면 가득 만화책과 무협지들로 빼곡히 채워진 책장 아래 길쭉한 의자들이 멋없이 놓여 있었고, 거기에 너나없이 옹기종기 앉아 만화책을 읽었다.

만화방 특유의 냄새 또한 잊을 수 없다. 오래된 책 냄새가 무겁게 내려앉은 만화방은 곰팡이들의 놀이터인 데다 스쳐간 담배와 라면 등의 향연이 뒤엉켜 야릇한 냄새를 발산시켰다. 으레 그러려니 했을 뿐 누구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고, 오히려 각인된 냄새들이 만화방임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도 만화방이 더웠던 기억은 찾을 길 없다. 방학 내내 자율학습을 강행했던 교실이 폭군에 가까운 더위와 사투했던 장소로 기억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학창시절 만화방은 금지된 공간이었다. 당시 제도교육은 유해성을 앞세워 규제를 남발했고, 여학생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만화방은 물론이고 오락실과 영화관 그리고 빵집조차 출입이 금지되었다. 금지된 공간에는 전방위적 감시의 시선이 상존했고, 체벌과 정학 처분이 오르내리는 처벌은 강력하게 행사되었다.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씨받이’만 하더라도 풍기단속을 이유로 영화관 출입은 엄두 내기 힘들었다. 이따금 호기로운 외출을 감행한 친구들은 어김없이 학생주임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고, 처벌 또한 호된 것이었다. 풍기단속에 내장된 청소년의 탈선 가능성은 금지된 공간들을 늘려간 이유를 제공했지만, 그렇다고 학생들의 출입이 잦아들지는 않았다. 만화방 또한 다르지 않다. 오히려 그곳에서 학생들은 일탈의 짜릿함과 해방감 그리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더욱이 당시 만화방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창작만화가 적잖았다. 1980년대 만화방은 일종의 만화책 대여점으로 수입 만화책보다 국내 창작 만화책들이 득세했다. 창작만화는 ‘이달의 신작만화’를 내걸고 쏟아져 나왔고, 거기에는 매번 쫄깃한 이야기와 호사스러운 눈요깃감이 가득했다. 대개 창작만화는 명랑만화와 순정만화로 대별되지만, 신작만화는 젠더와 상관없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상무의 ‘독고탁’ 시리즈는 야구 이야기의 명랑성에 가족애와 우애를 버무려 울고 웃던 기억이 선하다. 프로야구 붐을 만화로 체득하던 당시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은 ‘엄지’의 사랑에 힘입은 ‘까치’의 활약이 단연 돋보였다면, 허영만의 ‘이강토’ 시리즈는 권투 이야기로 이미 마니아층의 물꼬를 터고 있었다. 방향을 약간 틀어보면 고행석의 불청객 시리즈도 매력적이었다. 일종의 ‘구영탄’의 고난 극복기였는데, 반쯤 감긴 눈을 한 ‘구영탄’이 엉뚱한 매력과 천재적 능력을 발산하며 맞닥뜨린 어려움을 척척 해결했다.

명랑만화에 이런 입지전적 인물의 이야기가 많았다면, 순정만화는 다른 대하서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김영숙, 전혜린, 김동화 만화들이 다양한 연애담으로 순정만화를 주름잡았다면, 여기에 새로운 활력을 더했던 것은 황미나, 김혜린, 신일숙의 대하서사들이었다. 황미나의 ‘불새의 늪’이 16세기 프랑스의 종교분쟁과 맞물린다면, 김혜린의 ‘북해의 별’은 18세기 북해 연안의 가상 왕국 보드니아를 무대로 성공적 시민혁명을, 그리고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가상 왕국 아르미안의 마지막 네 왕녀의 삶을 각각 다루었다. 이들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과 박식함에 놀라고 유려한 그림체에 흠뻑 매료될 수밖에 없다.

만화방은 추억을 길어 올리는 마중물이다. 만화방은 우리가 경험하는 구체적 활동의 기반인 장소로 자리매김하며, 나아가 한 개인이나 집단이 가지는 장소에 대한 정체성을 보여준다. 긴 시간을 두고 책장 한 장 한 장을 떨리는 마음으로 넘겼던 만화책 읽기의 경험은 일신을 거듭해가는 웹툰이 대신하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최근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만화카페다. 만화카페는 깨끗하고 환한 실내에 앉거나 누울 수 있는 자리들, 거기에 차와 식사까지 가능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전의 만화방과 분명 다르지만 폭염의 나날, 추억을 공유할 장소로 제격이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