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이 하 수상하다. SNS 정보의 범람 속에서 선생은 학생에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녹화·녹음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상사와 부하도 스마트폰으로 상대의 발언을 증거로 남기고, 연인도 상호동의하에 사랑의 형태를 정한다. 배신과 폭로 그리고 사생활의 소실로 사람들 사이의 끈끈한 신뢰 관계가 고갈되나 싶다. ‘한 번 찍히고 털리면 끝장나는’ 세태 속에서 매우 사소한 일탈의 흔적이라도 남게 되면 가학과 피학의 세리머니가 시작된다. 얼굴은 SNS 뒤로 숨긴 채 찌르고, 흠집 내고, 발길질하는 이 시대의 폭력성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든지 한순간에 망가질 수 있는 이 험한 시절을 맨정신으로 살아내는 데 필요한 건 무너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헛된 수고가 아니라 비바람에 쓰러진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내면의 내비게이션이지 싶다.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진 인생은 본 적이 없다. 나무가 나이테를 제 속살에 새기듯 무너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해가며 자기의 역사를 써나가는 것이 결국 산다는 일 아니겠는가.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건 망가질까 두려워 꿈조차 꾸지 못하는 자기 억압, 또다시 일어설 용기조차 내보지 못하는 패배의 승복이다.
가끔은 내 일을 마치 남 일처럼 보는 ‘심리적 거리감’이 도움이 된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내 아픔이 남의 아픔보다 크기 마련이다. 이는 개체의 자기보호 본능과도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나만의 상처, 나만의 아픔이라는 자기함몰은 타인들의 고난에 눈을 감는 오만함이지 싶다. 사연들을 듣고 보면 우리가 겪는 고통의 내용은 얼추 비슷비슷하다. 날카로운 칼끝으로 심줄 하나, 하나를 도려내는 고통이라도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간 고등어에 소금 뿌리듯 ‘의미 찾기’에 열중하면 더 빨리 지친다. 막다른 벼랑으로 내몰리면 도대체 ‘왜?’라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하다. 머리에 쥐가 나더라도 의문부호를 느낌표로 정리하지 않고선 이 페이지를 넘길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어려움은 순차적인 대응을 허락하지 않는 게릴라 호우처럼 찾아오기 때문이다.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그냥’ 재수가 없어서, 어쩌다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기에, 삼각파도처럼 몰아닥친 악연이 꼬여버려서 등등. 의미 찾기가 가능한 경우의 수보다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이유로 겪게 되는 난관이 훨씬 많다. 단순한 문제를 복잡하게 분석하는 대신 일단 ‘그냥’ 넘기고 보는 것이 현명한 전략일 수도 있다.
그다음으론 그(들)과 자신 사이의 ‘무게중심’이 중요하다. 그들과 나 사이의 관계에서 나만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믿고 싶지만 이는 값싼 자기연민일 뿐이다. 일이 생기면 잘잘못을 따지고 가려내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게 만들고 싶은 건 매우 호모 사피엔스적인 감정이다. 우린 스스로가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믿고 싶어 한다. 원인제공을 누가 먼저 했건 상관없이 갈등은 같이 불을 지르고, 기름을 부어댔기에 악화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힘든 상황의 원인을 남 탓으로 돌려버리면 자기 위안은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담금질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사라진다. 그들 속의 악함을 발현시킨 나는 과연 친절한 사람인가.
원심력과 구심력 사이의 ‘균형감각’이 중요하다. 원심력은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고 같이 나누는 고마운 주변 사람들이고 구심력은 모든 고통을 결국 혼자서 짊어져야 하는 고독한 자신이다. 혼자서 헤쳐 나가는 일이 힘겨울 땐 주변의 힘을 빌려 순간순간의 고비를 넘기고 각자의 삶으로 흩어지기 시작하면 공감대라는 연결고리로 이어가는 합침과 나눠짐의 조율이 필요하다. ‘혼자 또 같이’라는 관계의 미학은 칭얼대지 않기, 비굴하지 않기, 경청하기, 감사하기, 강요하지 않기 그리고 일방적이지 않기로 작동된다.
마지막으로 ‘초점의 적절한 배분’이 필요하다. 현미경으로만 보면 고통이 확대 재생산되어 출구가 보이지 않고 망원경으로만 보면 극복 가능한 대응 매뉴얼을 찾기 어렵다. 때론 매우 치밀하게 관찰, 분석해서 대응할 필요도 있고 어떨 땐 아주 멀리 떨어져서만 보이는 큰 그림에 ‘아차’ 싶을 때도 있다. 살아낸다는 일은 누구에게나 결코 녹록지 않다. 그럼에도 살아 있다는 건 황홀하다. 사소한 그 모든 것이 세포 하나, 하나 속에서 기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세계정치학회 인권분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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