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올해가 재임 65년째다. 만 아흔한 살인 그는 지난 2015년 9월 고조모인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63년7개월2일)을 뛰어넘음으로써 ‘영국 최장수 군주’가 됐다. 이어 지난해 10월에는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70년126일)이 서거함에 따라 ‘세계 최장수 군주’ 자리까지 물려받았다.

엘리자베스 2세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이 가운데 더 관심을 끄는 것들은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일상사들이다. 올해 초에는 아흔을 넘은 고령임에도 윈저궁 근처의 템스 강변에서 말을 타는가 하면 운전기사 대신 직접 승용차를 모는 모습 등이 현지 매체에 공개됐다. 호사가들은 여왕 본인과 남편인 필립 애든버르(96) 공작의 건강 이상설이 계속 나오는 터라 왕실 측이 일부러 이런 모습을 연출했을 것이라 추측도 했지만 건강을 우려했던 영국 국민들은 나름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법하다.

아내의 뒤에 가려져 있긴 하나 영국에서는 필립공에 대한 호감도 역시 아주 높다. 많은 영국인은 엘리자베스 2세가 65년간 무탈하게 소임을 다 해온 데는 그림자처럼 여왕을 지킨 필립공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가끔 신경질을 부리지만 언제나 여왕을 즐겁고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동반자라는 게 대체적인 인물평이다. 또 언론 보도에 따르면 찰스 왕세자 부부가 불화를 겪을 당시 며느리인 다이애나비를 직접 다독거려줄 정도로 사려도 깊다고 한다.

65년간 외조를 했던 필립공이 지난 2일 버킹엄궁에서 열린 해병대 행사 참석을 끝으로 ‘공적 의무’를 마감했다. 그는 엘리자베스 2세 재임 중 2만2219회의 왕실 공무를 단독으로 수행했고 637차례에 걸쳐 해외방문을 했다. 또 780여 개 단체에서 대표나 회원, 후원자 역할을 했으며 곳곳에서 행한 연설은 5500번에 이른다.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는 필립공이 ‘여왕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보여줬다며 덕담을 건넸고, 제1야당인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대표는 “그가 지난 60년간 공적의무를 분명히 인식했다”는 감사의 말을 전했다.

필립공은 오는 11월이면 여왕과의 결혼 70주년을 맞는다. 건강도 건강이려니와 이제는 어깨에 내려앉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나이다. 어쨌든 많은 이의 박수를 받으며 떠나는 이의 모습은 아름다워 보인다. 사람인 이상 ‘여왕의 남편’으로 지낸 오랜 세월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터지만.

염창현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