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할아버지는 평생을 한량으로 사는 것이 꿈이었으나, 술을 가까이하지 못해 연애만 줄곧 하고 사셨다. 농사일에 허리가 곱은 아내와 작은아들을 김해시 진례면 송학리 학성 부락 손바닥만 한 밭에 밀어 넣고 당신은 하얀 정장에 백구두를 신고 시내 다방으로 출퇴근하셨다.

키 작고 못난 할머니가 아이를 줄줄이 낳는 동안은 초가집에 엉덩이나마 붙이고 계셨지만, 아들딸이 커서 몽땅 부산으로 진학을 한 이후엔 문현동 산복도로 단칸방에 하숙생처럼 묵고 몇 날 몇 일 얼굴도 봬주지 않는 날이 많더라고 했다. 백팔십이 넘는 키에 얼굴까지 미남이었던 할아버지는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정했다. 농사일을 부정했고, 대부분의 무학(無學) 아버지들이 노동일을 할 때 그마저 부인했다. 할아버지가 선택한 일은 길에서 배운 영어로 미군 부대에 들락거리며 창고를 지키고 군수품을 몰래 빼내 시장에 파는 것이었다. 몇억 원은 되었을 법한 현찰을 다락에 감춰두다가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미군에게 모두 빼앗기기 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는 호방한 사람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생기면 거침없이 연애를 걸었다. 미군 사건 이후 다소 의기소침하긴 했어도, 장성한 아들딸이 다달이 용돈을 잘 대주는 덕에 할아버지의 사교생활은 끊기지 않았다. 여자들은 유부남인 걸 알면서도 할아버지의 씀씀이와 남자다운 성격, 아름다운 얼굴에 곧잘 반했다.

평생 쓰린 속만 들이 판 할머니가 마침내 간암으로 돌아가셨을 때도, 할아버지는 아내의 죽음에 개의치 않았다. 당신에게 아내란 아주 어렸던 시절, 짝 한번 짓고 아이 낳아준 옛사랑에 불과했다. 낡은 연애는 돌아보지 않는 것이 바람둥이 만년 소년의 패턴이었다. 내가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랑 하나를 끝내려 할 즈음에, 할아버지는 팔십을 넘겨 찾아온 노환으로 자리보전을 시작했다. 어느 저녁, 병실을 찾아온 큰아들에게 할아버지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헐떡거리며 유언처럼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노인정에서… 내가 만나는 할마시가 하나 있는데… 할마시 자식들이 몬 만나게 한다 … 네가 전화 좀 해도라.”

격노한 큰아들은 병실을 나가버렸고, 큰아들의 딸인 나는 불경스럽게도 배꼽을 쥐고 웃었다. 팔십의 유언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전화 한 통 걸어달라는 것이라니. 많은 여자와 사랑하고 차이고 찼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가장 원했던 것이 그 지긋지긋한 연애라니. 이상하게도, 그 순간, 할머니의 죽음 이후 줄곧 미워했던 할아버지를 가장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미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아내와 불화한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인생에 연애를 최우선으로 두고 살아온 사람을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이 하나 끝날 때마다 나는 세상이 무너질 듯 울었다.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는 비정한 다짐도 했다. 이러다 속 깊은 사랑이 찾아왔을 때 이미 내가 무뎌져 있을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 한마디로 나의 열정이 지치지 않을 거라고 알려준 셈이다. 문현동 시절 할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말하곤 했다. 너는 날 닮았다, 그러니까 늘 인복이 넘치고 평생 배고프지 않을 거야. 다른 말로는 떼 잘 쓰고 하루의 기쁨만 좇고 산다는 점이 똑 닮았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뜨뜻미지근해지는 사랑은, 열정이 식은 게 아니라 고통을 상쇄하는 방법을 점점 더 많이 알게 되는 거라고 나는 믿는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칠십에도 팔십에도 오는 거라고. 나는 극복하는 방법에 더 익숙해질 뿐, 뜨거움이 변하진 않는다고.

그 유언을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는 말을 잊은 채 요양병원에서 몇 개월 지나시다 돌아가셨다.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은 어느 여자를 그리워하다 멈춘 회색의 유리구슬을 눈꺼풀 속에 담은 침상 위의 노인이었다. 끝내 사랑하던 이를 만나지는 못했으리라. 단 하나의 사랑을 믿진 않으나, 풍덩 빠진 그 순간에는 돌아보지 않았던 사람. 나의 할아버지. 그 방탕한 삶의 방식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뜨거움을 가르쳐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의 말처럼, 나는 당신을 참 많이 닮았다. 한 사람과 연애하는 시간이 조금 더 긴 것뿐이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