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중순 학회 참석차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다녀왔다. 비행시간만 24시간을 훌쩍 넘는 탓에 남미가 우리나라와 지도상 가장 대척점에 있음을 체감했다. 브라질은 포르투갈어를,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어를 각각 사용해 호텔 밖을 나서는 순간 구글 번역기와 ‘보디 랭귀지’가 총동원되는 ‘험난’한 여행이었다.

첫 남미 방문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곳은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 숙소를 시내 중심가인 오벨리스크 근처로 잡아 대통령궁이나 5월 광장, 에바 페론의 무덤이 있는 레콜레타 묘지까지 줄곧 걸어서 다녔다. 고혹적인 춤 탱고를 탄생시킨 카미니토 지역도 찾아보았고,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인 ‘카페 또르또니’에서 탱고 공연도 보았다. 옛 스페인 식민통치의 흔적이 남은 유럽식 건물과 잘 정비된 도로는 도보 산책을 쾌적하게 했고, 저녁이면 화려하게 불을 밝히는 수많은 공연장은 남미문화의 중심임을 실감하게 했다.

하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단연 보르헤스(1889~1986)의 도시이다. 경험과 환상의 세계를 뒤섞은 작품들로 마술적 리얼리즘의 형성과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발달에 기여한 보르헤스는 ‘백년의 고독’을 쓴 마르케스(1928~2014)와 더불어 남미를 대표하는 문학가이다. 유명한 콜론 극장 옆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보르헤스의 사진과 인용된 그의 시구는 이 도시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이 어떠한지 짐작하게 했다.

보르헤스는 도서관 사서에서 출발해 1955년부터 18년간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 관장을 맡은 바 있다. 흥미로운 건 젊었을 때부터 진행된 약시로 관장으로 일하던 시절 거의 시력을 잃었다는 점이다. 그의 시 구절 속 표현대로 “80만 권의 책과 어둠을 동시에 가져다준 신의 절묘한 아이러니”였던 것이다. 대표작 중 하나인 단편 ‘바벨의 도서관’은 육각형 진열실로 무한히 구성된 거대한 도서관을 우주나 세계의 모습으로 치환하고 있다. 도서관은 그의 일터이자 그의 문학적 상상력과 철학이 발현되던 중심이었다.

팔레르모 공원 부근 국립도서관을 애써 찾은 것도 보르헤스의 흔적을 찾기 위함이었다. 현재의 도서관은 1992년 완공된 것으로, 보르헤스가 관장으로 재직할 때 이전을 추진하였으나 완공 당시에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노출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물 외벽에 마르케스의 모습이 담긴 현수막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 도서관 앞뜰에는 보르헤스를 기리는 기념비가 자리 잡았고, 도서관 내부에도 보르헤스의 초상과 그가 쓰던 집기류가 전시되어 있었다. 실명이라는 장애 속에서도 관장으로 재직하며 아르헨티나의 현대문학을 일군 그의 집념이 느껴졌다.

‘엘 아테네오’ 서점 역시 문화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미지를 한층 더 고양시켰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입구를 지나 서점에 들어선 순간 갑자기 탄성이 나왔다. 1919년에 세워진 오페라 극장의 내부를 고스란히 살려 2002년 서점으로 다시 연 아름다운 공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멋진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천장 아래 서가가 들어차 있었고 자주색 커튼이 드리워진 무대는 커피숍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공간 자체도 아름다웠지만,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엄청난 인파에 더 놀랐다. 서가는 물론 서점 구석구석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730여 개의 서점을 갖고 있어 세계에서 인구 대비 가장 서점이 많은 도시로 알려졌다. 중고서적과 희귀본을 다루는 서점도 100개가 넘다 보니 ‘책의 도시’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실제로 도심을 지나치다 보면 군데군데 크고 작은 서점들이 들어서 있었다. 카페를 겸한 서점들도 눈에 띄었다. 인터넷이 발달한 대도시이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여전히 서점을 찾아 책을 고르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이 도시의 탄탄한 문화적 기반을 형성하는 데 서점이 공연장 못지않게 주된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형 인터넷 서점에 밀려 중소 규모 오프라인 서점들이 상대적으로 폐점 위기에 처한 우리 사회의 현실이 떠올라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르헨티나라고 하면 으레 가장 먼저 축구와 탱고가 떠오르게 마련이다. 이 도시를 방문하기 전 나 역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어로 ‘깨끗한 공기’라는 뜻을 지닌 이 도시에서의 며칠은 여행자들의 선입견을 크게 바꾸어놓을 만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950년대 페론주의 정권의 등장과 실각, 그리고 1970년대 중반의 군부 쿠데타 등 굴곡 많은 현대사를 겪었음에도 여전히 매혹적인 도시의 모습을 지켜왔다. 이 도시를 굳건히 지켜 온 것은 바로 사람들과 문화였다. 습관처럼 서점을 찾고 주말 저녁이면 다양한 공연장을 찾는 문화야말로 남미 최대의 문화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탄생시킨 저력이었다.

동서대 영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