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가 1516년 펴낸 ‘유토피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유토피아 사람들의 노동은 하루 6시간이다. 점심 전에 3시간 근무하고, 점심 먹은 뒤 2시간 쉬고 다시 3시간 일한다. 저녁 먹고 나서 8시가 되면 잠자리에 들어가 8시간 잔다. 유토피아 국가가 추구하는 최고 목적은 시민들의 마음을 해방시켜 발전할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제공하는 데 있다’.

모어의 유토피아에 비할 건 못 되지만, 노동시간 단축은 세계적 흐름이자 화두다. 저녁이 있는 삶, 주말이 보장되는 생활을 원치 않는 직장인이 어디 있을까. 노동시간이 길기로 이름난 우리나라에게는 더욱 절실한 과제다. 휴일에도 일하다 안전사고로 참변을 당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과로로 숨지는 일이 예사로 벌어지는 게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다.

알다시피 한국의 노동시간은 멕시코 다음으로 가장 길다. 지난해 우리 근로자 1인당 노동시간은 2069시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1764시간보다 305시간이나 많다. 특히 집배노동자는 연간 2869시간, 버스운전기사는 하루평균 11.7시간에 이른다. 사고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 거나 다름없다. 국내 한 취업포털의 최근 조사에서는 직장인 10명 중 7.8명이 야근을 하고, 1주일 평균 야근일수는 4일로 나타났다. 야근이 거의 일상화된 셈이다. 수면시간도 OECD 최하위로 ‘올빼미 국가’ 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일해도 생산성은 뒤떨어진다. 작년 OECD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서비스업의 1인당 노동생산성은 제조업의 40%로 OECD 회원국 중 꼴찌다. 이에 비해 과로로 인한 근로자 사망은 2008~2016년 2994명에 달한다(더불어민주당 신창현 의원 자료). 연평균 332명이다.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4년 연속 1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높은 자살률은 과로자살과도 무관하지 않을 테다.

지난달 경기도 안양의 40대 집배원 분신 사망사건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전태일이 분신했던 47년 전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울분이 나올 만하다. 얼마 전 부산고법 판결을 통해 드러난 50대 택배기사의 사례도 극명하다. 그는 물류회사에서 1주일에 56~60시간 일했는데, 평일 식사시간이 고작 20분이고 휴식시간은 따로 없었다. 트럭 위에서 쓰려져 숨지기 전날에는 배송량 폭주로 무려 1547개의 화물을 처리했다고 한다.이들뿐 아니라 과로사는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사정이 이렇지만 국내에는 외국과 달리 과로사나 과로자살에 대한 법적 정의가 없고 정부 차원의 통계·분석과 근본대책도 나오지 않고 있다. 일본이 2014년 ‘과로사 방지법’을 제정하고 이듬해 과로사 실태와 방지책 등을 보고한 백서를 내놓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우리 노동법이 장시간 근로의 주범으로 꼽히는 건 더 큰 문제다. 초과근무에 너무 관대해서다. 근로기준법 제59조의 특례조항이 그것이다. 초과근무는 주 12시간 이하로 제한돼 있지만, 운수·통신업과 물품판매·보관업 등의 업종은 예외로 뒀다. 노사의 서면 합의가 있으면 이들 노동자는 주 12시간 이상 초과근무가 가능하다. 게다가 별도의 상한선이 없고 휴식시간도 변경할 수 있다. 이러니 24시간 일해도 위법이 안 되는 현실이다. 수십 년간 개정되지 않은 이 조항이 장시간 노동의 적폐로 지목되는 건 당연하다.법 제정 당시와 달리 규제 완화를 거듭하면서 전국 사업체의 60%, 전체 종사자의 42.8%가 대상사업에 해당하는 기형적 특례가 됐다는 게 노동계의 하소연이다.

과거 하버드경영대학원 학술지에 근로자를 위한 최적의 노동시간이란 연구논문이 실렸다. 결론은 하루 7시간 근무사이클이 업무 효율성에 가장 좋은 것으로 나왔다. 여러 근무형태를 실험한 결과다. 500년 전에 언급된 유토피아의 하루 6시간 노동과 비슷한 느낌이다.

우리는 장시간 노동이 고착화된 ‘과로절벽’ 사회다. 하루 7시간도 언감생심이다. 하지만 이제는 과로사회, 피곤사회에서 벗어나야 한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도 휴식이 필요하다. 잘 쉬는 건 창의성과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 그 점에서 안희정 지사가 제안했던 국민안식제는 일리가 있다. 독일의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짧지만 생산성과 효율성이 낮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자리가 저출산 고령화 문제의 해법이라고 했다. 그기에 더해 ‘괜찮은 노동시간’이 중요한 시대다. 일자리 나누기에도 긴요하다. 노동시간이 줄면 임금 감소 등의 부작용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지금같은 장시간 노동과 과로사를 계속 두고볼 수는 없다. 이를 풀지 않고는 좋은 일자리 창출과 삶의 질 향상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노동시간 단축은 더 늦출 수 없는 과제다.

논설위원 ksyoung@kookje.co.kr